옛날에는 가뭄을 '한발(旱魃)'이라고 불렀다. 발(魃)은 중국 남방에 살았던 귀신인데 그가 나타나는 곳마다 가뭄이 든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이다. 가뭄이라는 자연현상을 귀신의 조화로 받아들였던 전통사회의 가뭄퇴치법은 그 귀신을 달래 내보내는 도리밖에 없었다. 기우제(祈雨祭)는 그런 의식을 바탕으로 시작된 제의다. 기우제의 첫 기록은 227년 백제 동명묘에서 지낸 것이고 두번째는 253년 신라 시조묘에서 지낸 것으로 나타난다. 고려 때는 불교식 기우제가 성행했다. 조선시대엔 유가의 영향으로 가뭄을 음양의 조화가 깨진데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재해석했다. 그래서 가뭄이 들면 왕이 근신하고 죄수를 풀어주며,양기를 억제하고 음기를 불러들이기 위해 남대문을 닫고 북문인 숙정문을 열어놓는 등의 방법을 써서 비오기를 빌었다. 음에 속하는 시장을 옮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하지만 토속신앙인 기우제는 그대로 이어져 조정에서도 가물면 5대 명산에 3품이상의 관리를 보내 제를 지냈고 극심할 때는 왕이 직접 백관을 거느리고 종묘나 사직단에 나가 기우제를 지냈다. 농민들은 용그림을 모셔놓고 제를 지내거나 대신 도롱뇽에게 비를 비는 풍속도 있었다. 기상관측이 시작된 1904년부터 85년까지 1개월 이상 강수량이 전혀 없었던 가뭄은 총 1백29회로 연평균 1.6회의 빈도를 보이고 있다. 가뭄은 해를 거르는 일이 없었던 셈이다. 39년,77년에 들었던 가뭄은 가장 심했다. 30년래 최악의 가뭄으로 농민들이 큰 고통을 겪고 있다. 현대의 과학기술도 가뭄과 홍수엔 결정적 대응책을 내놓지 못하는 탓인지 곳곳에서 잇달아 기우제를 지내고 있다는 소식이다. 키로 물을 까부르거나 호미로 웅덩이 바닥을 긁는, 잊혀졌던 전통 기우제 의식까지 치렀다니 비를 기다리는 애타는 마음이 어느 정도인지 헤아려진다. 이 달 중순이면 비가 오고 말일께부터는 장마철로 접어든다는 것이 기상청의 예보다. 어렵사리 가뭄을 이겨내고 나면 홍수가 뒤를 잇는 것은 아닌지.'3년 가뭄에는 살아도 석달 홍수에는 못산다'했는데 홍수대책이 더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