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일본 돌아가는 것을 보면 갑자기 시계가 1백년 전으로 되돌아 간 듯한 느낌이다.

1백16년 전인 1885년 3월16일 일본의 ''지지신보(時事新報)''는 ''탈아론(脫亞論)''을 사설로 실었다.

이 신문은 당시 일본 최고의 논객이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1835∼1901)가 창간한 것으로,이 사설은 바로 그의 글이다.

이 글에서 후쿠자와는 당시 조선이 일본을 따라 빨리 문명개화의 길로 들어서지 않고 있음을 개탄한다.

조선의 수구세력이 집권한 채 머뭇거리는 것을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고 선언한 것이다.

''일본은 이웃나라와 함께 문명의 길로 들어서기를 무작정 기다릴 수는 없다. 일본만이라도 이미 문명의 길로 들어선 다른 나라들과 함께 미개한 나라들을 대하자''는 것이다.

일본은 아시아 국가이지만 아시아를 뛰어 넘어 서구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조선이나 중국을 상대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때마침 서구의 열강들은 다투어 아시아대륙으로 침략의 손길을 뻗치고 있었다.

이 시점에서 그가 주장한 ''탈아''란 바로 일본도 이제 힘을 갖게 되었으니 서구 열강과 마찬가지로 식민지개척에 나서자는 뜻이 된다.

당연히 그것은 이웃나라 조선이나 중국의 멸망과 그 식민지화를 전제하고 일본이 그 앞장을 서자고 선언한 셈이 된다.

실제로 그는 얼마 뒤 다른 사설에서 ''조선인민을 위해 조선이 망할 것을 바란다''는 극단적 표현으로 조선을 저주하기도 한다.

물론 1백여년 전 신문에 쓴 그의 글을 지금 한마디 한마디 의미있게 해석할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가 이 ''탈아론''사설을 쓰게 된 데에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석달 전인 1884년 12월 서울에서 김옥균(金玉均)등 개화파가 일으켰던 쿠데타가 ''3일 천하''로 끝났다.

그들 가운데 김옥균 등 일부는 일본으로 망명했지만 많은 희생자가 났다.

후쿠자와는 김옥균의 친구였으며,갑신정변의 후원자라 할 수 있다.

그 정변이 실패했음을 알고 후쿠자와는 흥분했던 때문이다.

후쿠자와는 군인도 아니었고,정치인도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1901년 2월8일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일본의 그 후 국제정치,또는 식민지 개척에 직접 관계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가 예언한 대로 일본은 점점 서구 나라들을 닮아 동아시아에서 식민지 개척 경쟁에 뛰어들었고,그것은 대만과 조선의 합병,그리고 만주사변과 중국 침략으로 이어졌다.

후쿠자와는 누가 뭐래도 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전후 시기 일본 최고의 지성인이었고,가장 영향력있는 언론인이었다.

신문사를 운영하고,베스트셀러 책을 잇달아 냈으며,게이오(慶應)대학의 창립자이기도 하다.

당연히 그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오늘날 일본돈 최고액권 1만엔짜리에는 그의 초상화가 들어있다.

그런데 후쿠자와 사망 1백주기에 일본 총리가 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와 첫 여성 외무장관인 다나카 마키코(田中眞紀子)는 이웃 나라들의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수정 요청을 공개적으로 거부했다.

또 고이즈미 총리는 처음으로 야스쿠니신사에 공식으로 참배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이래저래 튀는 언동으로 이들의 인기는 하늘 높이 치솟고 있다.

그런데 이런 경향은 소설가 출신 정치인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도쿄 도지사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불법입국 삼국인(일제시대 식민지 출신을 지칭한 경멸어)이 흉악범죄를 일으킨다"며 일본에 중국과 한국인 범죄자가 많다던 그는 지난주에는 중국인의 유전자까지 들먹였다.

말도 안되는 이런 인종주의적 발상에 까지 일본 국민들은 못본체 하거나 환영하는 분위기다.

그의 인기는 높아만 가고 있는 것이다.

특히 중국의 경제 성장으로 위협을 느끼기 시작한 일본인들은 1세기 이상 누려온 동아시아에서의 우월적 위치를 잃게 되는 것이 아닌가 걱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더욱 일본은 한국이나 중국과는 다르다고 강조하려는 듯하다.

후쿠자와 사후 1백년에 다시 탈아론이 일고 있다.

그렇다고 그들이 개척할 새 식민지가 어디엔가 있을리는 없다.

잘못하면 ''신 탈아론''은 동아시아에서 더욱 고립된 일본을 만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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