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국계 금융인맥 ]

씨티은행 최근 2년간 투자상품 판매 1조2천억원, 체이스맨햇턴 지난 5년간 순이익 4천8백80억원, 도이치은행 부실채권 고작 4억원….

주요 외국계은행 서울지점들의 경영 성적표다.

외국계 은행들이 장사를 잘 한다는 얘기는 새삼스런 것이 아니다.

하지만 "외국계은행 서울지점이 이미 43개에 달하고 씨티 체이스 등은 한국시장에 진입한지 30여년이 지났는데도 국내 은행과의 실력 격차가 여전하다는 사실은 충격적"(한국은행 관계자)이라는 지적이 국내금융계에서 자탄조로 나온다.

명문대를 졸업한 우수한 인력이 시중은행에 들어간 지 20년이 지난 요즈음 대부분 ''명퇴''를 고려하게 됐지만 외국계 은행으로 간 사람들은 ''선진금융 베테랑''으로 대접받는 시대가 됐다고 토종은행 행원들은 자기비하조로 얘기한다

외환위기 이후 글로벌 금융기법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외국계 은행 출신들은 국내 금융계나 기업에 폭넓게 포진하기 시작했다.

과거 경제개발시대 산업은행을 비롯한 국책은행들이 대기업과 금융기관 재무담당 인력들을 배출해 낸 ''사관학교'' 역할을 했다면 지금은 외국계가 그 역할을 맡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글로벌세력이 ''내셔널파워''를 대체하고 있는 셈이다.

씨티은행 소비자 금융대표를 맡고 있는 하영구씨는 한미은행장으로 내정됐으며 강정원 서울은행장과 도기권 굿모닝증권 사장도 씨티 출신이다.

금융감독원의 이성남 부원장보는 외국계(씨티은행)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금융당국의 임원이 됐다.

체이스맨햇턴 출신으로는 김영종 비자코리아 사장, 최현재 서버러스코리아 사장, 최석진 푸르덴셜생명 회장 등이 자리잡고 있다.

프랑스계 파리바은행과 독일계 뱅크스 트러스트은행에서 10년 가까이 근무하다 지난 1989년 삼성비서실 국제금융팀장으로 특채된 황영기 삼성투신운용 사장은 외국계은행의 금융노하우를 삼성전자와 생명 등 삼성그룹 주력사들에 불어넣은 일등공신으로 평가받는다.

이들 외국은행출신들은 일찌감치 익힌 국제금융기법과 실무능력을 앞세워 ''금융시장 개방시대''의 총아로 각광받고 있는 것이다.

작년에 산업은행에서 씨티로 자리를 옮긴 문성진 지배인은 "외국계은행이 우량 대기업들만 상대하며 돈벌이에만 열중하고 있다는 것은 옛날 얘기"라며 "일을 배우면서 앞선 금융시스템에 놀라는 경우가 한두번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체이스맨햇턴에서 18년간 근무한 김영종 비자코리아 사장은 "외국은행 출신들은 70,80년대 경제개발 당시부터 한국경제의 조력자 역할을 해왔다"며 "특히 국내 금융계가 국제수준에 맞는 구조조정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선진 금융기법을 전달하는 등 나름대로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25년간 일했던 씨티를 그만두고 지난 3월 신한은행으로 자리를 옮긴 오용국 상무도 "외환위기 당시 씨티는 한국 대기업에 대한 지원을 오히려 늘리는 등 도움을 주었고 기업(도매)금융과 소비자(소매)금융 부문에서 새로운 금융상품과 마케팅 기법을 도입해 한국 금융기관들을 자극했다"고 말했다.

이같은 외국계 출신들의 약진은 국내 금융기관의 선진화를 가속화시키는 첨병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김병주 서강대 교수는 "글로벌감각을 가진 사람들이 한국금융계를 ''리드''하는 경향이 더욱 확산돼야 한다"면서 "시스템개혁과 함께 인적교류를 통한 ''노하우전수''가 주효할 수 있다"고 말했다.

스탠더드차터드와 JP모건에서 13년간 일했다는 하나은행 조영석 외화자금팀장은 "외국은행에서는 팀워크보다는 개인적인 성과에 따라 연봉이 결정되므로 철저하게 수익중심의 업무를 할 수밖에 없다"며 "외국은행 출신들이 국내은행으로 자리를 옮기고 나면 기업문화의 차이 등으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력양성 시스템을 지속적으로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씨티 출신의 우리금융지주회사 민유성 부회장도 "이제 국내 금융기관들끼리 경쟁하던 시대는 지났다"며 "외국계 은행들과 경쟁을 하기 위해선 그들이 어떻게 의사결정을 하고 리스크를 관리하며 전략을 짜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민 부회장은 "이를 위해선 외국은행에서 근무한 경험을 가진 인력을 잘 활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금융감독원 은행검사국 검사6팀을 이끌고 있는 최명희 팀장도 씨티에서 17년간 근무한 글로벌 금융통이다.

외국은행 검사업무를 맡고 있는 최 팀장은 "국내 은행들이 선진 금융기법을 통해 높은 수익성을 추구하려면 외국계에서 노하우를 쌓은 인력들을 많이 영입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다른 평가도 있다.

한국은행의 모 인사는 "외국계은행에 입행했으면 그 은행 본사에서부터 ''글로벌 매니저''로 실력을 인정받고 서울지점을 동북아 금융센터로 육성하는 리더역할을 해야 진정으로 한국 금융산업발전에 기여하는 것"이라면서 "외국계 출신들의 평가는 아직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기획취재부 오춘호.조일훈.장경영 기자 ohcho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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