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전,어느 절에서 있었던 일이다.

선(禪)을 통해 한 경지에 올랐다는 그 주지 스님은 탁월한 데가 있었다.

초파일에 등을 켜려고 온 신도들에게 "신도 여러분,우리 절은 등을 켜지 않습니다.마음의 등,진리의 등을 켭시다"라고 했다.

뿐만 아니라 지난해 사용했던 연등들은 모두 도반 스님의 절에 실어다 주어버렸다.

무소유 삶을 실제로 보여준다는 나름대로의 확신이 서 있었던 까닭이다.

이때 신도들 사이에서는 난리가 났다.

''무얼 먹고 살까.무얼 가지고 절이 유지될까''하는 세속적인 걱정이 태산 같았다.

일부에서 ''이상한 주지 스님''이라고 평한 것 도 무리가 아니었다.

대단한 용기가 아니면 어려웠으리라.

나는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잘 되겠지''하고 낙관했다.

사심이 없이 삼보를 위해 불사를 하면 성패 여부를 떠나서 꼭 원만히 회향하는 것이다.

결과에 마음을 크게 두지 않아도 성중(聖衆)이 옹호한다고 옛 선현은 말씀했다.

요즘 우리는 과정을 건너뛰고 목적을 이루는 데에만 서두르지 않나 하는 느낌이 있다.

후일담으로,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주지스님이 활불(活佛) 생불(生佛)이었다고 한다.

성인도 일반 범속한 시류를 따른다고 했던가.

일반 절의 초파일 연등행사를 그렇게 탓할 게 없다.

왜냐하면 ''중생의 세계''이니까.

그리고 중생세계는 모양과 소리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깨달음의 진리 세계에서는 한 법도 취 할 게 없으나,이웃을 위한 불사에서는 한 법도 버릴 게 없다''는 법문 그대로이다.

연등행사는 그래서 좋다.

꽃이 피는 봄날 밤에 형형색색의 등불이 밤하늘을 수놓는 모습은 장관이다.

가족들끼리 혹은 연인들끼리 불심(佛心)을,촛불 심지를 돋우듯이 돋우고 즐기는 멋도 대단한 것이다.

어린 시절에 경험한 연등축제의 추억이 반백의 나이를 지나 문득 꿈결같이 다가오는 아름다운 시간이 있다.

더구나 이미 유명을 달리하여 곁에서 멀어진 어버이나 도반이 생각날 때에는 눈물겹다.

절에서 ''이 값은 얼마이고,저 값은 얼마''이고 하며 장사꾼 흉내를 내어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은 옥의 티라고나 할까.

본래 연등 행사의 취지는 신라시대 때부터 ''마음의 등,진리의 등을 켜는 행사''로 자기 집에서 손수 만들어 집밖에 내다 거는 것이 원칙이었다고 하니 새겨 들을만한 이야기다.

''대지도론(大智度論)''은 제2의 석가,용수 보살이라고 하는 탁월한 스님의 1백권 저서인데 이 가운데에 실린 법문 한 대목을 소개한다.

''물속(水中)의 달을 보고 환희심으로 손을 내밀어 취하려고 하는 소아의 모습이,대인에게는 웃음거리다.

지혜가 없는 사람 또한 이와 같이,신체를 보고는 나의 전부인 양 생각한다''

신체에 집착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기원전 2∼3세기 때의 말씀은 요즘 우리 세태를 두고 한 것 같다.

''몸''은 물속의 달과 같다.

이 ''몸''에 집착하면 지혜로운 사람의 웃음거리가 된다.

''무엇을 먹을까,무엇을 입힐까'' 온통 이 생각이다.

지나치면 소위 황금 만능주의를 낳게 되고 육체본위로 살게 되는 것이다.

어린 왕자는 꽃이 있는 아름다운 집을 상상한다.

하지만,어른들은 크기는 몇평쯤에 값은 어느만큼 돼야 직성이 풀린다.

초파일 절에서 연등을 얼마나 많이 달았느냐 하는 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

한데도 이야기는 그렇지 않은 세태다.

육체본위이고 물질본위에 빠지면 불교는 그 길로 나락으로 빠지는 것임을 뜻이 있는 현자들은 경계한다.

보조 국사 지눌 스님은 당시 고려의 부패한 현실을 개탄했다.

''불교중흥을 위해 송광사를 정혜결사(定慧結社)의 근본도량으로 삼고 불타의 근본 정신으로 돌아가자''고 부르짖은 것도 이와 같다.

보조 국사 지눌 스님이 ''5월의 문화 인물''로 선정되었기에 더욱 뜻이 깊다.

보조 국사 지눌 스님은 이 시대에 하나의 태양과 같은 존재로 다가온다.

JIMUK@chollian.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