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건(張騫.BC ?~114)은 전한(前漢)의 무제(武帝)가 월지(月氏)와 손잡고 흉노를 치기 위해 기원전 139년 파견한 특사였다.

기원전 139년 장안을 떠난 그는 도중에 흉노의 포로가 됐다.

10년의 억류생활 끝에 겨우 도망쳐 월지에 도착했으나 협공 설득에는 실패하고 13년만에 구사일생으로 귀국했다.

''사기(史記)''와 ''한서(漢書)''에는 이 일을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사명이었던 월지의 요령은 끝내 얻지 못한채(要領不得) 귀국길에 올랐다''

지금도 흔히 쓰는 ''요령부득''이란 한자숙어는 이런 고사에서 유래된 말이다.

비록 ''요령부득''이라는 사가의 평가는 받았어도 그는 미지의 세계였던 서역(중앙아시아지역)을 처음 중국에 알리는 개척자 역할을 해냈다.

그가 서역 각국의 민족 풍토 지리 산물 등을 알리자 동서의 길이 트였다.

서역을 통해 명마(名馬) 보석 포도 수박 등이 수입되고 중국에서는 비단 금 등이 수출되기 시작했다.

서역이 동서문화의 길목이 되는 것도 이때 부터다.

실크로드라는 대상로가 생긴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한혈마(汗血馬) 역시 2천여년전 장건의 서역여행으로 알려져 사마천의 ''사기'' 등에 기록된 명마다.

어깨부근에서 피와 같은 땀을 흘리고 돌을 밟으면 자국이 나며 하루에 천리를 달릴 수 있다고 한다.

기원전 104년 이광리(李廣利)가 이 말의 산지인 페르가나(大宛國·현 우즈베키스탄 페르가나주 일대)를 정벌하고 개선할 때 한혈마 수십마리를 받은 무제가 ''서방 끝에서 온 천마(西極天馬)''라고 칭송했다는 기록도 있다.

중앙아시아 기마민족의 생활사를 연구하는 한 일본인 학자가 천산산맥 인근에서 피와 같은 땀을 흘리는 한혈마를 발견했다고 주장해 화제가 되고 있다.

사진도 찍어두었다고 한다.

동양의 전설적 명마로만 여겨 왔던 한혈마가 실재한다는 것은 좀처럼 믿어지지 않는다.

하기야 학자들은 최근 지중해에서 2천3백여년전 난파선을 찾아내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가 허구가 아닌 사실임을 과학적으로 밝혀내고 있다.

어떻든 한혈마의 실재여부는 주목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