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피어나는 초록잎들 속에 벚꽃이 만개한 경복궁옆을 지나다 문득 오랫동안 그곳에 낯익었던 중앙청 건물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잠시 생각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일제 강점기를 드러내는 한 대표적인 상징물이었던 육중한 그 건물이 시원하게 치워지고, 대신 단아하고 기품있는 광화문이 다시 세워진 것을 누가 마다하랴.

인왕산 아래 경복궁과 함께 쭉 뻗은 세종로 길을 바라보며 우리 서울이 얼마나 아름다운 도시인가도 새삼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없어진 중앙청 자리에 복원된 광화문을 바라보며 마음이 후련하기보다 이상하게도 뭔가가 걸리는 것은 웬일일까.

요즘 일본교과서의 왜곡문제로 많은 분들이 분개하고 답답해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혹은 그 건물이 쉽게 허물어버리기에는 건축학적으로 매우 의미있는 건축양식이었다는 이유만도 아니었다.

결국은 언젠가 허물어버릴 유적이었다해도, 그토록 서둘러야 할 필요까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보기 싫은 것을 단번에 치워버리는 것도 좋지만, 쓸 수 있을 때까지 쓰고 난 뒤 충분히 헐어지면 그때 없애버리는 것도 장구한 시간앞에 의연한 자세요, 당당함일 것이다.

가령 아름다운 비원에서 출발해서 조선왕조 명성황후의 슬픈 흔적을 보여 주고, 중앙청을 한바퀴 돈 뒤 박정희 군부정치의 종식을 이룬 10.26의 현장, 궁정동 안가와 분단의 현장인 판문점을 묶어서 한국 역사를 한눈에 답사하는 역사관광투어코스를 만들었다면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한국을 찾는 관광객들이 대부분 한국에는 볼 것이 많지 않다고 하는데, 이런 역사투어코스야말로 세계에 단 하나밖에 없는 우리만의 것이 아닐까.

미국의 워싱턴에 가면 스캔들투어라는 여행 패키지상품이 아주 인기 상품이라지 않는가.

백악관.워터게이트호텔.워싱턴포스트신문사 등을 한바퀴 돌며 정치스캔들의 현장을 보여 주는 것인데, 그곳에 가보았댔자 덩그런 건물밖에는 아무것도 없음에도, 사람들은 그 스캔들 투어버스를 타기 위해 달러를 지불한다고 한다.

십수년전 인도의 캘커타에 갔을 때도 그랬었다.

캘커타 같은 고도에는 볼 것도 많고 인상적인 것도 많았지만 가장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은 빅토리아 메모리얼이라고 부르는 영국 식민지시대의 궁전이었다.

인도를 지배했던 영국의 빅토리아 왕조가 사용했던 책상.집기.화려한 예복, 그리고 금박이 사진틀 등이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보존된 채 사람들의 발길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천마디 말보다 강하게 당시 영국의 강압적 착취와 식민지 인도의 슬픔을 말해 주고 있었다.

한국의 수도인 서울의 심장부에 육중하게 서 있는 일본의 총독부 건물을 보며 세계인들은 일본이라는 나라가 동아시아에서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똑똑히 실감할 것이다.

그들에게 그 불행한 원자폭탄이 투하되기 까지를 곰곰이 새겨보았을지도 모른다.

얘기는 다르지만 독일의 뮌헨에 가면 뜻있는 사람들은 경치 좋은 명소보다 먼저 다카우수용소를 찾는다.

유태인 학살 현장을 세계인에게 보여주는 곳이다.

이로써 독일인들은 스스로 그릇되고 부끄러운 역사를 철저히 반성하고,동시에 그러한 역사가 다시는 재발하지 않도록 깊이 다짐하는 곳이기도 하다.

유태인의 수북한 머리카락, 억울하게 죽은 자들의 안경과 신발들을 보고는 전신에 진땀이 솟던 기억이 새롭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잔인한 히틀러정부에 대한 증오보다는, 그토록 철저하게 자기참회를 드러내는 독일인에 대해 진심으로 감탄을 보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또한 놀라기도 했다.

일본은 교과서에서 슬며시 희석시키고 있고,우리는 말끔히 치워버린 일제 강점 역사의 대표적 상징물이 서있던 광화문을 지나며 나의 봄날의 생각은 끝도 없이 이어져 갔다.

역사란 마음에 드는 것만 선택해서 남기고 선별해서 보여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역사를 말함에 있어 ''만약''이라는 전제처럼 부질없는 일도 없다고 하나,중앙청도 궁정동도 사라져버린 경복궁 부근을 지나면서 부질없이 많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을 만큼 작은 한숨을 홀로 내쉬었다.

mj@poet.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