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봉진 < 워싱턴특파원 >

''외교는 말''이라고 했던가.

미 해군정찰기와 중국 전투기의 접촉사고로 빚어진 11일간에 걸친 미·중간의 대치관계는 ''very sorry''라는 단어 하나로 그 매듭이 풀렸다.

치밀한 득실계산을 해 온 양측은 부활절을 앞둔 절묘한 시점을 택해 ''큰 거래(big deal)''를 성사시킨 것이다.

''유감(regret)''에서 ''애도(sorry)''로, 그리고 결국에는 ''매우 미안하다(very sorry)''로 바뀐 말 하나가 24명 승무원의 처지를 바꿔놓는다는 것은 마술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일왕(日王)이 한국인들에게 "통석의 염을 금할 길 없다"는 말장난으로 고비를 넘겼던 한·일간의 과거사를 상기해 보면 이해 못할 일도 아니다.

그러나 게임종료는 아직 멀었다는 것이 미국인들의 인식이다.

미 해군정찰기는 아직 중국에 억류돼 있고 그 운명은 오는 18일 양측의 고위 실무회담 이후에나 결정될 전망이다.

주요 정보는 이미 파기됐다지만 그래도 ''비밀정보 덩어리''일 수밖에 없는 기체반환이 이뤄질 때까지는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공화당의 조 피트 하원의원은 "반가운 소식이지만 우리는 반밖에 얻어내지 못했다"고 강조하고 있다.

중국은 중국대로 난리다.

CBS NBC 등 미국 TV들은 중국 시민들과의 인터뷰를 내보내며 "중국인들 대부분이 조기송환에 분노를 표시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특히 "최소한 중국은 실종된 조종사 왕웨이(王偉)를 찾아낼 때까지는 석방을 미뤄야 했다"는 한 시민의 반응은 이번 사건을 바라보는 중국인들의 단면을 보여 준 것이기도 하다.

"칠레 등 남미 6개국을 순방중인 장쩌민 국가주석이 미국의 사주를 받은 이들 남미제국 정상들과의 회담과정에서 세뇌당한 것 아니냐"는 분노를 터뜨리는 시민도 있었다.

어찌됐건 미국인들 대부분은 "미국이 잘못한 것은 없다"고 믿고 있는 분위기다.

파리를 방문중인 콜린 파월 국무장관은 "사과(apology)란 무엇인가 잘못해 책임을 인정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전제, "우리로서는 잘못한 것이 없기 때문에 사과는 가능하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미측이 사용한 ''유감(regret)'' ''애도(sorry)'' ''대단히 미안함(very sorry)''이라는 일련의 표현은 중국 조종사에 대한 애도를 표시한 것이었으며 "사고로 불가피하게 중국측의 허가없이 중국 영공에 들어간 것"에 대해 "대단히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사고가 발생한 장소는 영공밖이었으나 비상착륙을 위해 영공을 침범할 수밖에 없었다는 치밀하게 계산된 설명이기도 하다.

그러나 ''very sorry''라는 단어 하나에 모든 거래가 성사되었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중국이 미국을 자극해서 얻을 것은 없다.

그것은 미국도 마찬가지다.

"미국과 중국은 ''전략적 경쟁(strategic competition)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런 관계는 쉽게 바뀔 수도 없고 바뀌지도 않을 것이다. 따라서 미국과 중국의 관계는 끊임없는 대치관계를 유지할 것이다"

워싱턴의 브루킹스연구소 베이츠 길 동북아정책연구팀장의 진단이다.

중국은 2008년 올림픽유치를 갈망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 지원 없이는 이룰 수 없는 꿈이다.

날로 늘어나는 미국 무역적자의 가장 큰 수혜국은 다름 아닌 중국이다.

민주당의 토머스 대슐 상원 원내총무는 "미.중간에는 아직도 대량 파괴무기 비확산문제, 인권문제, 대만.중국관계,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등 쟁점이 남아 있다"며 중국을 압박하고 있다.

''very sorry''라는 단어 하나를 협상장 문밖에 내걸고 미국은 미국 편한 대로, 중국은 중국 편한 대로 해석하는 선에서 매듭을 지은 것은 미.중 양국이 앞으로도 계속해야 할 협상모델인지도 모른다.

전략적 경쟁관계란 바로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yangbongjin@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