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당시 통상산업부에서 있었던 이야기다.

그해 그나마 부진한 수출을 뒷받침하고 있던 반도체의 가격도 떨어져 수출에 빨간 불이 켜지고, 무역수지적자는 1백억달러가 넘어 눈덩이같이 쌓여갔다.

청와대는 수출촉진을 위해 ''경쟁력 10% 높이기''라는 캠페인을 벌이고, 통상산업부는 ''품목별 담당관제''를 만들어 수출을 독려하기에 이르렀다.

무역수지적자는 계속해서 쌓이는데 환율은 절상돼 왔고, 관세율 조정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중국의 수출이 활기를 띠면서 가격경쟁력에서 밀리던 수출업체는 더 이상 원가를 줄일 수 있는 여력이 없어 ''경쟁력 10% 높이기'' 캠페인은 구호에 그치고, 적자는 날로 늘어나기만 했다.

담당과장들에게 품목별로 수출목표액을 정해 장관이 매일 챙기는''품목별 담당관제''는 고생만 하고 실효는 없었다.

담당과장들이 매일 담당수출업체에 수출금액을 확인하고 독려하는 전화를 처음엔 담당임원이 받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부장 과장으로 내려가더니 나중에는 담당사원에게까지 내려가게 됐다.

장관은 매일 밤 10시에 세종로 정부청사 뒤의 어떤 빌딩에서 회의를 소집해 그날의 수출실적을 묻고 독려했으니 담당과장들은 죽을 맛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수출업체에 전화를 한 통상산업부의 담당자에게 수출업체의 담당자가 "매일 수출실적을 체크한다고 수출이 늘어납니까? 수출실적을 보고한다고 정작 수출을 위해선 일도 못하겠으니 이제 일 좀 하게 제발 전화 안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불평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했다.

그러나 매일 밤 10시에 장관에게 당일의 수출실적을 보고해야 하는 담당과장들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어, 때로는 전화도 못하고 대충 짐작으로 수출실적을 보고하는 일도 있었다고 했다.

차관이나 차관보 국장들도 매일 밤 회의에 참석해야 했는데 자정을 넘기는 야밤회의에 어떤 간부는 한잔 걸친 저녁술에 꾸벅거리기도 했다고 했다.

어느 날 이런 사정에 관한 정보보고가 청와대에 올라가 말썽이 일자 매일 밤 10시에 열리던 수출독려회의는 없어졌고, 무역수지적자는 사상 최대인 1백53억달러나 됐다는 이야기다.

오죽했으면 그렇게 했겠느냐고 이해도 되고 ''관치''로 수출을 증가시키겠다는 뜻도 가상하지만, 아무래도 코미디 같은 이야기다.

지난 3월 수출실적은 1백43억달러로, 1999년 4월 이후 23개월만에 처음으로 작년에 비해 0.6% 줄어들었다.

미국은 IT산업의 거품이 꺼지면서 10년의 호황 끝에 경기가 급속도로 하강국면으로 들어서게 됐고, 일본은 부동산과 금융의 거품이 꺼지면서 10년간 불황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 요인이다.

구조적으로는 중국의 가격에 밀리고 일본의 기술에 뒤진 것이 요인이고.

지난주 정부는 경제장관간담회를 열고 ''미국과 일본 경기둔화에 대응한 수출마케팅 강화대책''을 마련하고 장관급을 단장으로 하는 경제협력사절단을 중동 중국 중남미 아프리카 등에 파견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미국과 일본 편중에서 전방위 공략으로 방향을 바꿔 틈새시장을 파고들겠다는 ''대대적인 세일즈 외교전략''이라고 한다.

그럴싸한 전략 같아 보인다.

그러나 내가 만난 수출업자는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기업이 죽기 살기로 나서도 안되는데 정부가 나서 세일즈외교를 편다고 얼마나 실효성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오히려 가격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는 수준으로 환율을 유지하면서 금리를 인하해 주고 경색된 자금시장을 원활히 해주는 노력이 더 필요하다는 것이다.

내가 미국 대사관에 근무할 때 수출촉진을 위해 공관에서 매달 소집하는 무역상사간담회에 참석한 일이 있었는데 어떤 상사 간부가 "아무런 실효성도 없는 회의 좀 안했으면 좋겠다"고 불평한 경우도 있었다.

특히 본국에서 고위공무원이 와 관계기관이나 기업을 안내해야 하는 경우나, 바쁜 무역상사 사람들을 불러 언제나 비슷한 간담회를 할 때는 불평이 더 많았다.

통관지연이나 반덤핑관세 등 현지 무역상사들이 겪고 있는 무역애로나 제대로 해결해 주었으면 좋겠다고들 했다.

기업이 못하는 수출을 장관들이 갑자기 나서 ''관치''로 해결한다?

그럴듯한 얘기 같은데 왠지 공허하게 들린다.

mskang36@unite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