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4학년 때던가, 내 고향 마을에 이상한 소문이 떠돌았다.

모월 모일에 지구가 어떤 별과 충돌해 산산조각이 난다는 것이었다.

옆 마을에 살던 한 젊은 농부는 몇마지기 안되는 땅을 팔고, 팔리지 않는 땅은 문서를 잡히고 빚을 내 그 돈으로 지구의 환란이 예정됐다는 날까지 한달여 동안 날마다 잔치를 벌였다.

떡과 술을 빚고 돼지를 잡았다.

마침내 그날이 왔으나 지구는 물론 산산조각이 나지 않았다.

봄날이라 하늘 가득 황사가 날렸을 뿐이었다.

헛된 소문에 가산을 탕진한 젊은 농부의 심정이 얼마나 황당했을까는 여기서 말할 필요조차 없다.

그날 해가 질 때까지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 확인되자 농부는 이런 말로 한탄했다고 한다.

"내 복에 무슨 난리가 있을라고…"

이 농부의 한탄은 듣기에 따라서 매우 철학적이다.

그는 세상의 종말을 제 팔자로는 얻을 수 없는 축복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평생 벗어날 길 없는 가난에 더 이상 시달리지 않을 것이며, 한번도 누리지 못한 호사를 잠시라도 맛볼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경솔한 젊은이가 경마에서 엄청난 액수의 공금을 날려버리고 차라리 세상이 박살나기를 바라는 것과 같은 극단적 경우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제 인생이 실패했다고 회한을 안고 사는 사람들, 삶이 의미 없는 노역의 연속이라고 여기는 사람들, 세상이 돌이킬 수 없는 타락에 빠져 있다고 한탄하는 사람들도 한 세상이 끝나고 다른 세상이 찾아와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랄 것이다.

사실 많은 종류의 유사종교들은 세상의 종말이 임박했다는 생각에 그 교리의 기초를 두고 있다.

천지가 개벽해 다른 하늘이 열리면 이 누추한 삶이 끝나고 영원한 평안과 영화가 올 것이라고 그 ''도사''들은 말한다.

몸과 마음을 옥죄는 불안은 더 이상 없다.

이 세상의 구차한 재산을 바치고 영원한 안식을 얻게 되니, 투자로 치면 이보다 더 좋은 투자가 없다.

이 유사종교의 교리는 사기꾼들의 변설과 매우 비슷하다.

사기꾼들도 작은 투자 뒤에 커다란 이득이 있다고 꼬드긴다.

사기를 당한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처음부터 그것이 사기일 것이라고 생각했고 막판에는 사기가 분명하다고 확신하면서도 일이 성사되면 돌아오게 될 이득을 포기하기 어려워 그 함정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고 한다.

얼마 전 어느 식당 앞을 지나는데, 간판에 ''산꽃게''라고 적혀 있었다.

그때 내 앞을 걸어가던 젊은 여자가 동행하던 남자에게 물었다.

"여보 산에도 꽃게가 있어요?"

필경 ''살아 있는 꽃게''라는 말을 ''산에 있는 꽃게''라는 말로 이해했던 것이다.

그런데 남자의 대답이 더 놀라웠다.

"뭐 산에도 꽃게가 있나보지" 남자는 이렇게 말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한겨울에도 딸기와 장미꽃을 볼 수 있는 세상이니 산의 꽃게가 크게 대수로운 것은 아니다.

나는 그 젊은 부부의 대화를 엿들으며, 한 세상의 종말을 생각했다.

산에 있는 것은 산에 있고, 물에 있는 것은 물에 있으며, 춘추와 절기가 구분되던 한 세상의 사물 질서가 이제 우리 마음 속에서 사라지고 딴 세상이 온 것이다.

그러니 종말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한 세상과 다른 세상 사이에, 우리 마을의 젊은 농부가 원했던 그 축복된 해방이 없다는 것이다.

삶의 고통도 그대로이고 나날의 근심 걱정도 그대로이다.

새 세상에 대한 환상은 유사종교의 전유물이 아니다.

모든 정책홍보, 상품광고들이 삶의 해방과 새 세상을 선전한다.

자고 일어나면 다른 하늘이 열리는데, 실은 낡은 것들이 새로운 너울을 둘러쓰고 다시 나타날 뿐이다.

그리고 낡은 것들이 새롭게 도래하는 주기가 점점 더 짧아질 뿐이다.

이 현상을 현대의 비판철학은 산업사회의 팡타스마골리, 곧 ''마술환등효과''라고 부른다.

우리는 마법에 걸린 듯 날마다 새 세상으로 달려간다.

낙오자들만 이 마법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낙오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한 걸음 멈추고 내가 달려가는 곳이 어디인가를 살피고, 그 질주를 못 따라가더라도 내가 패배자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며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있다면, 거기에 우리가 원하던 해방이 있을 법도 하다.

septuor@hanane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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