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의 타계는 상징적으로 보면 "한국의 기적"을 일궈낸 창업세대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음을 뜻한다.

지난 87년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이 작고한 것을 비롯해 최종현 SK그룹 회장은 형 종건(73년 작고)의 뒤를 이어 창업 1.5세대로 SK그룹을 이끌다 지난 98년 별세했다.

LG그룹의 창업자인 구인회 회장(구자경 LG 명예회장의 선친)은 지난 69년 타계했다.

이로써 한국을 대표하는 4대 그룹의 창업자들이 모두 세상을 떠났다.

30대 대기업중에선 한국 철강산업의 태두로 평가받는 동국제강의 창업주인 장상태 회장이 작년 4월 타계했다.

"삼표연탄" 신화를 일군 강원산업 정인욱 회장은 지난 99년 별세했고 에너지산업계의 산증인인 김근수 대성그룹 명예회장도 올 2월 유명을 달리하는 등 한국 재계의 "별"이 잇달아 지고 있다.

코오롱의 창업주인 이동찬(80) 전 회장은 지난 96년 아들인 이웅렬 코오롱 회장에게 경영권을 물려준 뒤 일선에서 물러났다.

"창업자에겐 은퇴가 없다"는 조중훈(81) 전 한진그룹 회장도 지난 99년 잇달은 항공기 안전사고에 따른 책임을 지고 퇴진했다.

지난 50년대 고 구인회 회장이 꾸려가던 사업에 동참해 LG의 양축을 이루는 "구씨.허씨 체제"의 시발점을 만든 허준구 현 LG전선 명예회장은 일선에서 물러난 지 오래다.

이에 따라 재계에는 창업자로부터 경영 바통을 이어받은 현대가의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과 정몽헌 현대 회장,이건희 삼성 회장,최태원 SK 부회장 등 2세 경영체제가 자리잡았다.

구본무 LG회장이 지난 95년 일찌감치 그룹총수가 된 데 이어 최근에는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의 손자인 이재용(33)씨가 삼성전자 기획담당 상무로 선임되는 등 3세 경영인 시대가 어느 새 열리고 있다.

이들 2,3세 경영인들에 모든 걸 물려주고 무대 뒤로 퇴장하는 창업세대들은 해방전후 쌀가게와 자동차 수리점(현대),정미소와 설탕판매(삼성),포목점과 치약(LG),직물장사(SK)로 사업을 시작했다.

지난 60,70년대 개발경제 시대 맨주먹으로 "잘 살아보자"는 구호를 외치며 현재 경제규모 세계 10위권 국가를 세우는 데 정열과 땀을 바쳤던 "주식회사 코리아" 창업의 주역들이다.

국내외 경영학자로부터 "한국 근대사에 남을 불세출의 경제 영웅(고 정주영 회장)" "한국이 낳은 기업의 명장(고 이병철 회장)" "미래를 꿰뚫은 학구형 기업인"(고 최종현 회장)이라는 찬사를 들었다.

그러나 이들 창업주는 외환외기 이후 정경유착과 부실경영 책임에 대해 일부 비난을 받으면서 영욕을 함께 한 인물로도 평가된다.

한국경제연구원 좌승희 원장은 "한국 재벌의 창업주들이 한국 경제의 근대화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며 "앞으로 이들의 공적을 차분히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정주영 전 회장의 작고를 계기로 창업세대들의 발자취를 되돌아보고 치열한 한국 재계의 좌표를 찾아보는 것은 의미가 크다.

정구학 기자 c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