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남기 < 공정거래위원회 위원장 leeng@ftc.go.kr >

현대인들은 늘 과중한 업무와 바쁜 일상에 쫓기게 마련이다.

그래서 이웃에 누가 사는지도 알려고 하지 않으며 이웃의 애경사에도 기쁨이나 슬픔을 함께 나누지 못하고 산다.

이런 각박함이 새삼 느껴질 때 터키에서 만났던 어느 쿠르드족을 떠올리곤 한다.

내가 제네바 대표부 경제협력관으로 근무할 때였다.

여름 휴가를 보내기 위해 이웃 가족과 함께 터키를 여행하다 잠깐 쉬어가려고 길옆 호숫가에 차를 세웠다.

그곳에는 수백명의 쿠르드 난민들이 임시 거처를 만들어 지내고 있었다.

쿠르드족은 2천2백만명이나 되는 세계 최대의 소수민족이다.

이들은 7세기께 아랍의 지배를 받기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독립된 나라를 갖지 못하고 있다.

여기저기 쫓겨다니며 터키 이란 이라크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것이다.

터키에서는 쿠르드어로 자기 자식을 교육시키거나 방송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설움을 받고 있다.

우리 일행은 간식을 먹기 위해 호숫가에 돗자리를 깔고 준비해온 수박을 쪼갰다.

그것은 설익은 수박이었다.

그러나 목이 탔던 식구들은 그냥 먹기 시작했다.

이때 갑자기 잘 익은 수박 한 쪽을 내미는 손길이 있었다.

현지에 있던 쿠르드족이었다.

그가 보기에도 우리가 먹는 수박이 정말 맛없어 보였던가 보다.

우리는 쿠르드족이 내민 맛있는 수박을 달게 먹고 우리가 가져온 빵과 과자로 그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후 나는 잠시 쉬기 위해 팔베개를 하고 누웠다.

그런데 이번에는 누군가가 베개로 내 머리를 받쳐 주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라 쳐다보니 역시 옆에 있던 쿠르드인이었다.

이 경험은 우리 식구 모두에게 충격이었다.

어떻게 쫓겨다니는 이들이 잠시 지나가는 이방인에게 이렇게 친절을 베풀 수 있을까.

그들은 자신을 보호해 줄 정부도 없고 민족의 희망도 짙은 안개 속에 가려져 있었다.

이런 쿠르드인이 보여준 한 줌의 여유는 안정된 사회 속에서조차 주변을 돌아보지 못하는 우리의 삶을 뒤돌아보게 한다.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속담도 있지만 ''콩 한 조각도 나눠먹는다''는 속담도 있다.

힘들고 빡빡하기만한 일상 속에서도 이웃을 돌아보는 포근함을 가져보는 것이 진정한 삶의 모습이 아닐까.

근육도 수축과 이완이 균형을 이뤄야 튼튼해지는 것처럼 우리 삶도 긴장과 여유가 적절히 균형을 이뤄야 풍요해진다.

요즘도 이일 저일로 분주할 때면 그때의 쿠르드족이 가르쳐준 고난 속의 여유를 떠올리려고 애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