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는 세계수출에서 포도는 1위, 자두는 2위, 사과 배 키위는 3위, 복숭아와 체리는 5위를 기록하고 있는 농업대국이다. 이런 나라에 5년이나 10년 이내에 관세를 완전 철폐한다는 것은 우리 농업을 다 내어 주는 것과 같다. 현재와 같은 UR 관세하에서도 수입농산물 피해가 막심한데 칠레와 무관세나 저율관세를 적용하는 FTA가 체결될 경우 우리 과수산업은 붕괴되고 우리 농업 전체의 몰락으로 이어질 것이다''

지난 3월5일 전국농업협동조합장 일동 명의로 주요 일간지에 게재된 ''한.칠레 자유무역협정에 대한 농협의 입장'' 일부다.

1998년 시작해 작년 12월까지 진행되어온 한국과 칠레의 자유무역협정은 난관에 봉착했다.

성난 농민들에 밀려 수입농산물에 대해 무관세 혜택을 줄 수 없다는 한국의 입장 개진에 대해 칠레정부도 타이어 냉장고 세탁기 등 2백57개 품목을 협상대상에서 제외하거나, 10년동안 연차적으로 관세를 인하하겠다는 양허안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칠레가 비교우위를 가진 부분에 대해 한국이 무역확대를 거부하니,한국이 비교우위를 갖고 있는 부분에 대해 칠레가 저지하고 나선 것이다.

만약 한국과 칠레간 자유무역협정이 끝내 파국에 이른다면 한국 농민들의 승리일까.

당장은 세계적으로 경쟁력 있는 칠레산 농산물이 수입되지 않으니까 농민들이 보는 피해가 없을 지 모른다.

그러나 칠레산농산물 저지의 대가를 누가 치러야 하는가.

그 대가는 한국으로의 수출기회를 박탈당한 칠레 농민이 아니라 여전히 비싼, 농민 단체들이 경쟁력이 없다고 시인한 국산 농산물을 소비할 수밖에 없는 국내 소비자들이다.

한국 노동자들의 임금상승률이 생산성증가를 앞지른다고 아우성이지만, 여전히 임금상승은 치솟는 물가를 따라잡기 바쁘다.

뛰는 물가를 따라잡기에 허덕이는 임금상승률, 임금상승률에 못미치는 생산성증가로 약화되는 제품경쟁력, 제품경쟁력 하락에 따른 이윤하락으로 임금상승은 더 어려운데 고물가 주요원인의 하나인 높은 농산물가격은 떨어지지 않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어찌 보면 한국의 노동자들은 경영진에게 임금인상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구매력을 저하시키는 높은 농산물가격의 인하를 위해 수입개방을 요구해야 할지 모른다.

많은 사람들은 경제적 약자인 농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국제시세보다 훨씬 높은 가격을 치르는 정도의 희생쯤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과연 한국사회 구성원의 다수가 그러한 생각을 갖고 있는지 확인하려면 그 선택권을 소비자들에게 돌려주어야 할 것이다.

싼 외국농산물을 먹기보다는 비싸더라도 우리 땅에서 생산된, 믿을 수 있는 우리농산물을 먹겠다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그렇게 높은 가격을 치르면서까지 우리농산물을 먹을 필요가 없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수입개방은 이처럼 다양한 선호를 가진 소비자들에게 선택권을 주자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농산물시장이 개방되면 한국농업이 무너진다는 것은 단순 논리다.

수입개방이 된다고 해서 외국농산물이 홍수처럼 밀려오는 것은 아니다.

그런 사태는 절대다수의 소비자들이 국내농산물을 철저히 외면할 때만 가능하다.

만약 어떤 산업이 국내 소비자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받는다면,그 외면당하는 이유에 대한 검증이 필요하고 대처방안이 강구돼야 하지 않을까.

경제적 약자가 보호 대상이라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어떠한 방법으로 그들을 보호할 것인지 하는 것이다.

현재와 같이 소비자주권을 무시하는 방어위주의 보호가 언제까지나 가능한 것이 아니라면, 어떠한 방법이 지속가능하고 효율적인지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이번 칠레와의 자유무역협정 체결 와중에서 보여준 농민들의 분노는 예고편에 불과하다.

WTO 농업협상이 본격화되면 더 많은 농민들이 거리에 나서게 될 것이다.

이들의 분노를 정치적인 논리로 빠져나가기에 급급하면 농민들의 분노는 좌절로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소비자들은 영원히 피해자로 남게 될 것이다.

byc@mm.ewh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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