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반도체 업계가 투자 속도 조절에 나선 것은 제품 가격이 추가로 떨어질 경우 자칫 공멸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작년 7월 이후 제품가가 계속 떨어져 경영에 적지 않은 차질을 빚고 있는 D램 업체들은 한번에 수조원씩 들어 가는 라인 건설에 신중할 수 밖에 없다.

반도체 수탁조립 사업을 하는 TSMC 등 대만의 파운드리 업체들도 최근 들어 주문 감소로 공장 가동률이 떨어져,현실적으로 대규모 투자를 집행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투자 축소 배경=D램 등 주요 반도체 제품의 가격 하락이 투자 축소의 가장 큰 요인으로 꼽힌다.

현재 북미시장에서 거래되는 D램 현물가격은 삼성전자 등 일부 경쟁력있는 기업을 제외하면 총 원가를 위협하는 수준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D램 가격이 추가로 떨어질 경우 물건을 팔수록 손해를 보는 상황에 몰릴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미국 마이크론과 우리나라 현대전자 등 D램 사업 비중이 높은 기업들은 현 상황이 지속될 경우 갈수록 수익성을 유지하기 어려워지게 된다.

반도체 전문가들은 올들어 세계 경기 침체에 따른 PC판매 위축으로 당초 예상보다 반도체 시황이 악화될 것이란 인식이 급속히 퍼지면서 투자조절에 나서는 것으로 해석했다.

이에 따라 세계 주요 D램 업체들은 생산량 위주의 경쟁을 가급적 자제하고 부가가치가 높은 비메모리 사업을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현대전자가 비메모리 매출 비중을 작년 10%에서 올해 17%로 끌어올리기로 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반도체 가격 전망=주요 업체들이 투자 규모를 축소하면 공급량이 줄어 D램 등 반도체 가격 회복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반도체 가격이 충분히 떨어진 만큼 투자 축소가 심리적인 안정을 가져오는 데 기여할 것이란 분석이다.

삼성전자 김일웅 이사는 "D램 현물가격이 심리적 지지대 근처까지 와있는 만큼 공급량 증가율이 장기적으로 둔화될 것이란 전망이 퍼지면 제품 가격이 상승세로 돌아설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D램 수요의 70% 가량을 차지하는 PC 메이커들이 반도체 재고를 충분히 줄인 만큼 반도체 메이커들의 투자 축소는 예상보다 강한 가격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

이에 반해 D램 가격이 가까운 시일내 회복세로 돌아서긴 어려울 것이란 전망도 없지 않다.

세계 경기 침체가 장기화될 경우 반도체 수요증가율이 위축되면 업체들의 투자 축소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가격 회복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익원 기자 ik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