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서당의 훈장에게 아이들이 달려와 외쳤다.

"할아버지, 뱀이 우물가를 기어다니고 있어요"

"사불범정(蛇不犯井)이니라"

조금 뒤에 아이들이 다시 달려왔다.

"그런데요, 뱀이 우물로 들어가고 말았는데요"

"사필귀정(蛇必歸井)이니라"

실력과 생각이 없는지 출중한 재치를 뽐내고 싶으신지 훈장 할아버지는 졸지에 ''蛇不犯井''을 "뱀은 우물을 침범하지 못하는 것"으로, ''蛇必歸井''을 "뱀은 반드시 우물로 들어가는" 뜻으로 바꿔 버렸다.

이런 해학(諧謔)은 한자(漢字)가 잊혀지는 요사이 세간(世間)에서 재미를 잃어간다.

또 일상 범해지면서 누구도 의식하지 못하고 지나치는 오류(誤謬)가 되고 있다.

문자의 목적은 무엇을 알리려는데 있다.

그런데 우리 정부나 언론의 문자표기 양태에서는 이런 의도가 있는지 의심될 때가 자주 있다.

예컨데 정부가 IMT2000 사업의 비동기식 및 동기식 사업자를 선정했다는 기사를 본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동기(動機)를 사용한다는 것인가, 동기(銅器)가 들었다는 것인가.

童妓는 아닐테고, 同氣 冬期?...

전문가의 도움을 얻어야 "통신위성과 일치시킴(synchronization:同機)" 여부를 가늠한 것임을 알겠지만, 그래도 同機라는 힌트가 있으면 어느정도 도움이 됐을 것이다.

한글전용은 원래 북한에서 강제됐다.

남한에서는 이승만 박정희정부를 지나면서 이 운동이 강화됐고 이제는 가로, 역, 상점의 간판과 표지에서 한자가 모두 사라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좋게 보면 민족문화의 고유성을 보전하려는 "주체적" 노력이 넘친 때문이고, 심하게 말하자면 소국(小國) 콤플랙스가 배타주의로 발로하거나 서양지향의 사대주의가 중국부정(中國否定)의 모양새로 왜곡 표현된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쇄국해야 생존하는 북한이야 말할 바가 못된다.

그러나 21세기 지구촌의 주역이 되겠다는 남한은 이같은 국수주의 병증에서 벗어나야 할 많은 이유를 가지고 있다.

첫째, 오늘날 우리가 쓰는 대부분의 어휘는 한자에서 유래한다.

그러므로 한자로 표기될 때 뜻이 분명해지고 특히 지명 인명 전문용어 등에선 한자표의(表意)의 특성을 버릴 수 없다.

한글로만 표기하면 社債시장은 私債시장과, 光州시는 廣州시와, 全대통령은 前대통령과, 聖公會는 成功會와 구별될 수 없다.

경제신문의 칼럼 이름도 "다산"이라면 자기식구들이야 茶山임을 알지만, 일반독자들에게는 아마 多産이 연상되기 쉬울 것이다.

우리말 전용(專用-이것도 한자다) 고집으로 우리는 과거의 문화적 전통으로부터 스스로 단절하고 무식해지고 오해하며 살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둘째, 13억 인구의 중국이 가지는 정치경제적 시사성 때문이다.

중국과 가장 인접한 지리적 문화적 배경을 가진 것은 우리의 운명이고 기회다.

중국은 계속 성장할 것이고 세계 최대의 시장이 될 것이다.

앞으로 중국과의 경제 정치 및 사회적 관계는 보다 커지고 한국을 찾는 중국인도 가속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우리의 대 중국관계는 10년 안에 미국보다 더 중요해질 것이 확실하다.

오늘의 한국은 영어제국이지만, 그 때가 되면 중국어와 그 말의 뿌리인 한자가 영어보다 더 중요해질 것이다.

셋째, 이른바 세계화를 추진하고 관광산업을 진흥한다는 목적과 배치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도쿄(東京)에 가면 일본 말을 몰라도 지하철을 탈 수 있고,상점을 찾아갈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인과 중국인은 서울에서는 한자표지가 없어서 도무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불평한다.

우리는 그들에게 똑같이 한국을 방문해 보고 경험할 기회를 차단하는 불공평을 저지르는 한편 관광한국의 이익도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한자사용으로 우리 문화를 잃는다는 소아병적 사고는 이제 버릴 때가 됐다.

2002년 월드컵 개최 준비에 나선 정부와 언론은, 지금부터라도 적어도 공공표지나 지형물에 대한 한자병기운동을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kimyb@ca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