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래 < 한국외대 과학사 교수 >

클린턴이 동네 상점에서 커피 한 잔 사들고 나서는 모습이 무척 산뜻하다.

노란 점퍼 차림으로 웃으며 나오는 ''보통 사람'' 클린턴을 보면서 나는 비로소 민주주의를 확인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클린턴 부부는 백악관을 떠나면서 지나치게 선물을 챙겼다하여 비난을 받기도 한다.

그런 그가 8년 동안 미국 대통령 노릇을 해내고,취임 때 보다 높은 인기 속에 물러났다는 것은 나같은 사람이 보기에는 여간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산뜻한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새 미국 대통령 부시가 취임하는 날 워싱턴엔 수많은 한국 정치인들이 칙칙하게 어리댄 모양이다.

관광삼아 취임식 자리에 갔던 것도 아닌듯하니,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에게 미국 대통령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돌이켜 보면 미국의 대통령이 한국인에게 대단한 존재로 인식되기 시작한지 1세기 하고도 반은 되는 것 같다.

우리 선조들이 최초로 미국 대통령을 만난 것은 1883년 9월18일 뉴욕에서의 일이었다.

지금부터 꼭 1백17년 남짓 전이다.

워싱턴에서 만난 것이 아니라,뉴욕의 5번가 호텔 대회의실에서 조선왕조의 전권대신 일행이 아서 대통령과 만났던 것이다.

1년 전의 수호조약에 따라 처음으로 조선왕조의 사신들이 미국에 갔을 때였다.

1882년의 조미(朝美) 수호통상조약 본문 제1조에는 미국 대통령을 ''대통령''이라고 쓰지 않고,''백리새천덕(伯理璽天德)''이라고 쓰고 있다.

아직 미국 대통령을 부를 적당한 표현을 발견하지 못해 프레지던트(President)라는 그 나라 말을 우리 발음으로 표기한 것이다.

하기는 그것도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 발음은 아니고,중국식이어서 이런 괴상한 표기로 된 셈이다.

1882년의 조미조약에 따라 미국은 이듬해 최초로 서울주재 영사를 파견했고, 그에 상응한 조치로 조선 정부는 고위 사절단을 미국에 파견해 예의를 표하게 된다.

이것이 민비의 친정 조카 민영익(閔泳翊)을 전권대신으로 한 보빙사(報聘使)일행이었다.

홍영식(洪英植)을 부사,서광범(徐光範)을 서기관으로 한 이들 일행엔 5명의 수행원이 따랐는데,변수(邊樹) 유길준(兪吉濬) 최경석(崔景錫) 고영철(高泳喆) 현광택(玄光澤) 등이었다.

1883년 6월 친선사절로 임명된 이들은 7월15일 제물포를 떠나 일본을 거쳐 9월2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그날 밤 이들은 당시 세계 최고의 호텔로,지은지 얼마 안된 팰리스호텔에서 묵었다.

기선 안에서 이미 서양식 생활을 익히기는 했지만,그들에게는 엘리베이터부터가 놀라운 것이 아닐 수 없었다.

기차로 워싱턴에 도착한 이들은 당시 미국 대통령이 뉴욕에 가 있었기 때문에 뉴욕으로 찾아가 인사를 하게 된 것이었다.

당시 대통령은 제21대 체스터 아서(Chester A Arthur 1829~1886)였다.

공화당 소속으로 전임 대통령 가필드가 취임 직후 암살당하자 부통령에서 올라간 사람이었다.

민영익 전권대신 일행은 아서 대통령에게 큰절로 인사했다.

아서는 민영익의 손을 잡고 서로 인사를 나눴는데,물론 민영익은 우리말로,아서는 영어로 했을 것이다.

통역은 세명이나 따라 갔는데,중국인 일본인 그리고 미국인 통역이 한사람씩이었다.

당시에는 영어와 한국어를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단 한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백17년이 흘렀다.

비록 민영익 등은 처음 만난 미국 대통령에게 마루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는 큰절을 올렸지만,비굴한 태도를 보인 것은 아니었다.

나라 안에서 임금에게 대하듯 공손하게 외국의 임금(?)을 대하려 했을 뿐이었다.

그후 세상은 크게 변해 지금은 한국인 누구도 미국에 가서 놀랄 까닭이 거의 없게 됐다.

그렇지만 미국 대통령에 대한 한국 정치인들의 짝사랑은 점차 커지기만 하여,언제 그칠지 알 길이 없다.

우리의 퇴임 대통령이 동네 상점에서 커피 사들고 나설 수 있는 날- 아마 그런 날이 오면 우리도 미국 대통령을 그리 짝사랑하지 않게 될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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