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말 우리 집 아이가 제 친구들에게 연하장을 보내기 위해 어느 인터넷 사이트에서 제공해 주는 동영상 카드들을 고르고 있었다.

숫자가 많지도 않은데 실제 카드에 직접 글을 써서 보내라는 내 권유에 "그런 복잡한 일을 어떻게 해요"라고 대꾸했다.

아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도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제 엄마에게 운동화 끈을 매달라고 발을 내밀고 있는 것을 보고,그 정도의 일은 이제 자기 손으로 해야 한다고 내가 말했더니,"그 복잡한 일을 제가 어떻게 해요"가 바로 그 대답이었다.

신발끈 매는 일이 그렇게도 복잡한 일인가.

그래서 내가 직접 시범을 보이며 가르치는데,따라하는 아이의 손놀림이 둔하기 그지 없다.

애가 표나게 게을렀던 것도 아니고,자립심이 없었던 것도 아니지만,손놀림을 훈련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장난감을 비롯해 모든 생활도구가 단발성의 스냅 동작만을 요구하는 환경에서 자라왔기 때문이다.

블록 같은 장난감도 꼭꼭 눌러서 맞추었고,음식도 포크로 콕콕 찍어서 먹었다.

이런 단발 동작에 비해 모든 손가락이 유기적으로 협조하며 연속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운동화 끈매기는 사실 얼마나 복잡하고 어려운 동작인가.

물질문명의 시대란 역설적이게도 몸이 물질을 누리지 못하는 시대다.

이제 육체가 물질을 접촉하는 순간이란 저 스냅 동작의 짧은 순간 뿐이다.

우리는 어디서나 단추를 누른다.

옷을 입을 때도 옷고름을 매지 않는다.

글을 쓰기 위해서도,커피를 마시기 위해서도,위층에 올라가기 위해서도 우리는 단추를 누른다.

우리의 육체가 물질과 교섭할 때 느끼게 되는 다양한 감각들은 이제 누름단추의 탄력으로 통일된다.

우리 같은 문학선생들이 시나 소설을 가르칠 때 갈수록 힘이 드는 이유 중에 가장 큰 것은,자연 사물에 대한 학생들의 감각이 매우 둔화돼 있다는 데 있다.

몸이 물질로부터 그 이외의 다른 감각을 느끼는 일은 이제 천한 일로까지 치부되는 실정이다.

일상생활에서부터 정치나 학문을 하는 데 사용되는 말도 마찬가지다.

옛사람들은 공부를 할 때 자기가 배우는 텍스트들을 모두 쓰고 외웠다.

그래서 누가 무슨 말을 하면 그 전거를 살피기 위해 암기한 글들을 되살려냈다.

그 뒷사람들은 외우는 일이 힘들어 카드를 작성했고,카드도 번거롭다고 여겨질 무렵부터는 간편한 인덱스 체계를 만들었다.

이젠 컴퓨터에 통째로 저장된 텍스트의 낱말을 검색하면 그만이다.

낱말 하나하나가 이제 단추로 바뀐 것이다.

성현들이 무슨 말을 했다면,옛사람들은 그 말을 쓰고 외우면서 자기 육체 속에 새겨 넣었다.

자기가 배우는 것의 의미와 자기의 몸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컴퓨터의 검색으로만 글자들을 만날 때 그 의미는 우리 몸 속에 들어오지 않는다.

아예 그 의미 자체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저 그런 모양과 발음을 지니고 여기저기 외톨이로 굴러다니는 단추들일 뿐이다.

약간 유식한 말로는 이런 말로 된 단추들을 코드라고 부른다.

공자나 석가가 무슨 말을 했건 그것들은 모두 그런 코드일뿐이다.공부하는 일만 그런 게 아니라 사는 일도 그렇다.

어떤 사람이 효자라고 불리기 위해선 정말로 부모를 잘 공양할 필요가 없다.

효도라는 코드를 이마에 붙이고 다니면 그만이다.

성실도 근면도 몸 안에 들어 있는 성실이나 근면이 아니라 얼굴에 붙이고 다니는 그런 코드일 뿐이다.

편리한 것으로 친다면 이보다 더 편리할수가 없다.그런데 코드에는 소비가 있을 뿐 생산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누군가 좋은 옷을 만드는 사람이 있어야 다른 사람이 좋은 옷을 입고 다닐수 있는것처럼,누군가 정말로 성실한 사람이 있어야 성실이란 코드를 얼굴에 붙이고 다닐 사람도 있는 것이다.누군가 의미를 생산해야 다른 사람들이 그 코드에 단추를 누를 수 있는 것이다.코드는 간편한데 생산은 어렵고 복잡하다.

septuor@hanane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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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약력=

△고려대 불문과·동대학원 졸업
△고려대 불문과 교수(現)
△저서 ''얼굴없는 희망:아폴리네르의 시세계''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