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보(雲甫) 김기창(金基昶)만큼 한국인들에게 친근한 화가도 없을 것이다.

그의 ''바보산수''나 ''미인도''는 어느 집에나 걸린 달력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1만원권 지폐속의 세종대왕도 그의 작품이다.

두툼한 운보의 얼굴은 세종을 닮았다.

운보의 데뷔작은 10회 선전(鮮展·1931)에 입선한 ''판상도무(板上跳舞)''라는 널뛰기를 그린 그림이다.

37년 선전에서 최고상을 받은 ''고담(古談)'' 역시 할머니가 아이들에게 옛날얘기를 들려주는 장면이다.

운보의 풍속에 대한 지속적 관심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해방을 맞은 운보는 스승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의 굴레에서 벗어나 고삐 풀린 야생마처럼 격한 실험을 계속했다.

어머니가 지어준 호인 ''운포(雲圃)''의 ''포''에서 굴레를 벗겨낸 ''보(甫)''로 바꾼 것도 변화의 의지를 나타낸 것이었다.

예술과 인생의 반려였던 우향(雨鄕) 박래현(朴崍賢)과 결혼한 것도 이 무렵이다.

6·25의 와중에서도 그는 미술사에 기록될 대표작을 남겼다.

30여점의 ''예수의 일대기''와 ''구멍가게''''노점'' 등 입체적 구성작품이다.

운보가 예수를 갓쓰고 두루마기를 입은 조선선비로 등장시킨 것은 기독교 토착화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대학교수 시절엔 ''이미지''연작 등 추상작업에도 몰두했다.

운보의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60세 이후 전통적인 산수도 장생도 화조도를 민화의 독특한 예술성으로 재구성해낸 창조작업이다.

''바보산수''시리즈가 여기 속한다.

민화가 순수예술의 극치라고 생각을 굳힌 그는 76년 아내와 사별한 직후 새로 그린 그림을 "바보란 천재의 다른 이름이며,바보가 세상을 보는 눈은 새롭다"는 데서 ''바보산수''라고 이름지었다.

대자연속에 풍속을 주제로 한 인간을 그려넣어 장난스러움과 짓궂음,웃음이 뒤엉켜있는 민화풍의 정감 넘치는 그림이다.

8세때 청각장애인이 됐지만 불굴의 의지로 예술혼을 불살랐던 ''고독한 거인'' 운보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삶을 더 빛나게 하는 것은 일찍부터 농아들의 복지사업에 앞장섰던 일이다. 운보를 ''바보산수''속으로 떠나 보내는 감회가 새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