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왕기가 서린 곳은 어디일까?

동교동, 상도동, 연희동?

대통령은 왕이 아니니 왕기를 운운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그래도 현대의 임금 노릇이 대통령직인지라 이 문제는 앞선 회에서 다룬 바 있다.

여기서는 왕조 시대의 서울 왕기를 살펴보는 것이 순서일 듯하다.

그 첫번째가 운현궁이 있는 종로구 운니동 일대이다.

이곳은 고종을 배출했을뿐 아니라 바로 이웃한 익선동에서는 철종을 내놓은 땅이다.

현재 지명으로 하자니 운니동, 익선동이지 실제로는 바로 이웃이나 마찬가지이다.

운현궁에 대해서는 앞으로 자세히 다루겠지만 익선동에 대해서는 얘기할 기회가 없을 것 같아 간단히 그 전말만 소개하기로 한다.

현재 익선동은 와룡동, 돈의동, 경운동, 낙원동, 운니동에 둘러싸여 있는데 서울 어디나처럼 가게와 술집들이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주택가의 전형을 유지하고 있는 곳이다.

이미 ''서울 6백년사'' 제 1권에서 지적하고 있다시피 서울의 최고 명당지인 경복궁과 창덕궁을 제외한다면 양기풍수(陽基風水)상 최고의 길지로 꼽힌다.

경복궁의 주산인 북악산과 창덕궁의 주산인 응봉을 연결하는 선의 남측면으로, 양지 바르고 배수가 잘 되며 남산의 전망도 좋은데다가 권문세가들이 궁궐에 가깝게 모여 사니 정보 교환의 장소로도 최적인지라 소위 서울의 북촌(北村)을 형성케 된 곳이다.(7회에 실린 그림 참조)

서울의 잘 알려진 지명인 한양(漢陽)이 기록에 처음 등장한 것은 신라 35대 경덕왕 때(755년) 고을 이름들을 중국식으로 고치면서부터이다.

우리 지명사(地名史)에서 최초이자 최대의 실책이 시작된 셈이지만(또 하나의 최대 실책은 일본인들이 고을 이름뿐만이 아니라 마을 이름까지 한자식으로 고치면서 그것도 자기네들의 편의상 본래 뜻을 거슬러가며 지은 일이다) 여하튼 한양은 그렇게 역사에 첫발을 딛는다.

여기서 한(漢)은 물론 한강이다.

또한 양은 음양(陰陽)의 양으로, 풍수에서는 산의 남쪽을 양이라 하고 물의 북쪽을 양이라 하기 때문이다.

산의 남쪽은 당연히 양지 바르므로 양이지만 물의 북쪽이 양이 되는 까닭은 물이 동서 방향으로 흐른다고 할 때 북쪽이 남향이 되고 남쪽이 오히려 북향이 되는 까닭이다.

또 한가지 풍수적으로 고려할 수 있는 사항은 이곳이 이미 고려 때 한양의 고을 터로 자리잡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익선동의 옛 지명 중에 한동 또는 한양골이란 것이 있는데 그 위치가 대략 익선동을 중심으로 낙원동과 돈의동에 걸친 지역에 해당된다.

고려 왕조는 불교의 선종과 함께 풍수지리를 국가의 지배 이념으로 삼았던 왕조이다.

고려의 중흥조로까지 일컬어지는 제11대 문종은 현철하고 영명하기는 했지만 술수에 크게 현혹당한 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하튼 그 시대에 이미 서울(南京)에 신궁을 건설하였다(是歲創新宮于南京)는 고려사의 기록이 있고, 이어 그의 셋째 아들이자 15대 임금인 숙종은 김위제의 주장에 의하여 다시 남경 건치를 추진하고 있으며 다음 예종 때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

그런 사실로 미루어 보면 이곳은 이미 오랜 옛날부터 명당으로 관심을 끌어오던 곳임에 틀림없다.

얘기를 앞으로 돌려 그 전말을 보면 이렇다.

본래 순조에게는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 아들이 네 살에 세자 책봉을 받고 임금되는 수업까지 받았으나 불행히도 22세에 세상을 뜨고 만다.

후에 문조로 추존되기는 했지만 임금 자리에 오르지는 못한 것이다.

문조 아들이 왕위를 이어 헌종이 되었으나 그 역시 23세에 후사도 없이 요절하고 말았다.

그래서 대통을 이은 이가 철종으로 사도세자의 증손이고 정조의 동생인 은언군 손자이자 전계대원군의 셋째아들이다.

그러나 그 역시 33세에 후사없이 승하한 인물이다.

은언군은 홍국영 등과 역모를 꾀하였다는 무고를 받아 강화도로 쫓겨나 빈농으로 불우한 일생을 보냈는데 그 아들이 철종의 아버지인 전계대원군인 것이다.

철종이 그런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강화도령이란 비아냥을 받았으나 과연 그의 출생지가 강화도인지, 아니면 익선동인지에 대하여 이론이 분분하지만 조선왕실 족보인 <선원계보기략>에 의하면 그가 중부 경신방, 즉 현재의 익선동에 있던 전계군의 집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으니 출생지는 이곳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 싶다.

''서울시사 편찬위원회''가 발간한 <동명연혁고(종로구편)>에 의하면 익선동 166번지에 전계대원군의 사당인 누동궁이 있었으므로 궁골 혹은 궁동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정확한 위치까지 집어내고 있는 형편이니 이를 반대할 이유는 없다.

한데 어쩐 일일까?

앞서 밝힌대로 철종 또한 후사없이 요절하니, 이제 우리의 주제 운현궁이 등장할 차례가 된 것이다.

도대체 어떤 동네이기에 임금은 내지만 후사없이 요절하게 되는 것일까?

게다가 망국을 재촉하는 마지막을 장식하는 임금이 되는 것일까?

임금만 된다면 모든 것을 포기해도 좋다는 극도의 이기심이 작용하는 터이기 때문일까?

야사에는 흥선대원군이 풍수에 매우 밝았으며 정만인(鄭萬仁)이라는 스님을 만나 그로부터 예산 땅 가야산 부근에 천하 대지가 두 곳 있다는 얘기를 듣는다.

한 곳은 이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요 또 한 곳은 만대영화지지(萬代榮華之地)인데 어떤 곳을 선택할지를 물었다.

흥선대원군은 주저없이 이대천자지지를 선택했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땅을 고르는 것은 땅 자체의 길흉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의지할 사람의 됨됨이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게 된다.

이대천자지지란 천자에는 오르지만 2대를 넘지 못한다는 무시무시한 한계를 내포한 개념이다.

그에 비해서 만대영화지지란 비록 임금을 내지는 못하지만 자손 대대로 영화를 누리리라는 뜻을 지닌 내용이다.

일반인들의 경우라면, 우선 나부터라도 임금에 오른들 2대에 끝장이 난다면 내 증손들부터는 어쩌란 말인가라는 고민이 생길 수밖에 없고 당연히 만대영화지지를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흥선은 그러지 않았다.

나중에 망해도 좋으니 무조건 임금 자리에 올려놓고 보자는 막무가내의 욕심이 작용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기야 권력에 맛을 들이면 골육도 죽이는 것이 세상 인심인지라 그러기도 하려니 하겠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이는 정신병리적인 이상을 의심받을 만한 행위이다.

지금도 무수한 사람들을 죽이고 수많은 가정을 파탄시키면서, 게다가 온갖 거짓과 술수를 써가며 소위 대권이란 것을 쥐었던 혹은 쥐려는 사람들이 있는게 사실 아닌가.

장자미(張子微)가 옥수진경(玉髓眞經)에서 지적한 바 "제왕의 흥성함은 덕에 있는 것이지 힘에 있는 것이 아니며, 그것을 지킴은 도에 있는 것이지 땅의 기운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

우리 풍수의 시조 도선국사의 말씀대로 오늘의 대권 주자들은 이 말을 "명심불망(銘心不忘)하였어라".

본사 객원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