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우 < 고려대 경영학 교수 >

서양화와 동양화 중에서 어느 것을 더 좋아하느냐는 물음에 피카소와 김기창 화백을 들먹이면 덩달이가 되는 수가 있다.

서양화는 포커,동양화는 고스톱의 대명사로 자리잡은 지 이미 오래됐다.

포커와 고스톱의 룰은 큰 차이가 있다.

포커는 기본 판돈을 놓고 시작하지만 새로운 카드를 받기 전에 추가적 배팅을 해야한다.

자금이 두둑할 땐 나쁜 패를 들었더라도 배팅을 계속해서 좋은 카드를 기다려볼 수 있다.

그러나 자금이 부족할 때는 안정적 패를 가진 경우에만 배팅을 하고 불안할 경우에는 미리 죽어버리는 것이 유리하다.

포커판에서 계속할 지,죽을 지는 위험과 수익의 상치관계를 고려해서 결정하게 된다.

고스톱판에서는 일단 게임에 휘말려들면 퇴로가 없다.

상대방이 판을 쓸며 기세를 올리고 있는 상황에서 형편없는 패를 들었더라도 게임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된다.

피박에다 광박까지 쓰고 나면 주머니가 거덜날 수도 있다.

포커판에서는 배팅자금이 바닥나면 손 털고 일어나야 하기 때문에 가진 돈을 털릴 뿐,빚을 질 일은 없다.

그러나 고스톱판에서는 잃은 돈을 다 갚지 못해 빚을 지고 끝나는 경우도 허다하다.

주식회사제도의 기본은 ''유한책임''제도다.

회사가 망하면 주주는 출자한 금액을 포기하는 이외에 다른 책임을 부담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기업이 부실해진 경우에도 주주는 돈을 더 출자해서 계속 사업을 영위할 지 또는 손을 떼고 떠날 지를 결정하게 된다.

주주에게 유한책임을 부여하는 대신,주식회사의 경영의사결정은 이사들로 구성된 이사회가 맡아서 하도록 돼 있다.

그러나 주주가 개인기업처럼 경영을 좌지우지할 경우에는 주식회사의 법인격이 부인되고,당해 주주는 무한책임을 부담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주식회사 이념에 부합되는 기업을 찾아보기 어렵다.

대주주가 경영의 전권을 행사하고 있고,채권단에서도 대주주에게 무한책임을 지우는 것이 일반적이다.

금융기관들이 기업에 자금을 대출하면서 대주주의 보증을 요구하는 것이 다반사이며,회사업무와 관련해서도 대주주의 재정적 책임을 부과하는 각서를 징구하기도 한다.

또 국가도 대주주에 대해 미납세금에 대해 2차납세의무를 부과하기도 한다.

대주주에게 무한책임을 부과하게 되면 경영의사결정이 파행적으로 이뤄질 위험이 높다.부실이 심화돼 회사가 퇴출되면 채권단의 책임추궁으로 대주주는 사재까지 털리게 된다.

따라서 회계장부를 조작하고 뇌물을 주는 등의 불법행위를 저질러 가며 끝까지 버티려 하게 된다. 주주의 유한책임만 담보된다면 이미 퇴출됐어야 할 기업을 무리하게 끌고 가다 부실만 심화시키는 경우가 허다하다.

거대한 부실덩어리로 전락한 기업에 거액을 대출한 금융기관이 부실화되고,부실 금융기관을 살리기 위해 대량의 공적자금이 투입돼 국민의 부담이 되고 있다.

외환위기를 초래한 주범으로 대기업의 불합리한 지배구조가 지목되면서 이를 개선키 위한 각종 제도가 마련되고 있다.

사외이사와 감사위원회제도가 도입됐고,경영에 간여한 대주주를 사실상의 이사로 보아 책임을 부과하고 있다.

집중투표제와 집단소송제도도 도입돼 대주주의 부담이 되고 있다.

이와 같이 대주주의 책임을 강화하다보니 주식회사 원래의 이념인 유한책임제도는 점점 약화되고 있다.

기업 대주주들의 의욕은 계속 위축되고 있으며,창업을 말리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고스톱판처럼 퇴로가 막혀있는 기업주들이 불안한 나날을 보내며 회사를 연명해 가고 있다.

추가적 책임만 없다면 모든 것을 털어 버리고 떠나려는 ''호랑이 등에 올라탄 기업주들''이 사방에 널려있고 기업매물이 홍수를 이루고 있다.

기업의 지배구조가 합리화되면 이에 발맞춰 주주의 유한책임을 보장하고 또 기업주가 물러설 길을 터주는 방안도 마련해야 한다.

주식회사제도는 원래 ''포커의 룰''과 유사하게 만들어진 것이다.

이를 ''고스톱 룰''로 바꿔 운영함으로써 부실을 심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부작용을 방지하기 위해선 유한책임제도의 기본을 지키는 방향으로 관련 제도가 개선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