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나같은 서생도 소문에 오르내리는 경우가 있다.

하도 여러가지라 스스로도 다 기억하고 있지 못하지만 정말 잊혀지지 않는 일이 한가지 있다.

오사카시립대학 문학부 조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노자키 미츠히코의 저서 <한국의 풍수사들>이란 책에서 읽은 대목이 바로 그것이다.

원래 이 책은 일본 인문서원에서 1994년 출간되었던 것인데 작년 3월 우리글로 번역된 것이다.

노자키씨와는 면식이 있었기 때문에 그로부터 이 책을 전해 받았지만 내가 일본글을 몰라 그저 덮어두고 있던 것을 그가 다시 번역본까지 일부러 보내주어 그 때에야 읽어보게 된 것이다.

내용중 해당 부분은 이렇다.

"최창조 교수가 서울대를 사직한 진상이 무엇인가를 둘러싸고 많은 얘기들이 오갔다. 연구 능력 운운하는 것은 표면상의 이유이고 사실은 대학의 인사 다툼에 말려든 것이라는 등, 연구 능력이 부족한 것이 폭로되어 부끄러워서 그만두었다는 등 하는 얘기들이 들려 왔다.
또한 최 교수에 대한 소문답게, 풍수에 관련된 것으로는 다음과 같은 얘기도 있었다. 평소부터 대통령 관저인 청와대가 북악산의 기맥을 압박하고 있어서 국가의 발전에 장애 요인이 되고 있다고 서슴없이 공언하는 최 교수를 정부는 좋게 보고 있지 않았지만,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전두환씨의 자택이 명당 자리에 속한다고 하는 말에 기분이 좋아서 그를 묵인하였다. 그런데 노태우 정권이 들어선 뒤 최 교수는 청와대는 물론 노태우씨의 자택까지 풍수적으로 좋지 않다고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전두환씨와 노태우씨의 두 자택은 엎어지면 코닿을 곳에 있는데도 자신의 집만이 풍수적으로 나쁘다는 말에 격분한 노태우 대통령이 뒤에서 일을 꾸며 최 교수를 쫓아냈다는 것이다"

참으로 실소를 금할 수 없는 한편의 저질 코미디를 본 느낌이다.

나는 지금까지도 두 분의 집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

내가 서울대를 나오게 된 이유는 다시는 말하지 않겠다고 이미 <녹생평론>이란 잡지에 분명히 밝힌 바 있기에 더 이상 거론하지 않겠다.

그게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 적도 없고 그 일을 후회하지도 않기 때문에 그점 분명히 해두고 싶어서이다.

다만 연구 능력 부족이 폭로되어 부끄러워 그랬다는 소문은 아무리 소문이라도 나에 대한 질책으로 여기고 평생 마음속에 새겨두고 반성의 소재로 남겨둘 생각이다.

사실 노자키 교수는 금년 46세의 매우 성실한 중견 학자이다.

그와 몇차례 만나면서 그의 인품을 직접 경험한 적이 있기 때문에 확언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그래서인가, 그는 위의 문장 다음에 덧붙이기를 "꽤나 잘 꾸며진 얘기이기는 하지만, 이것들은 전혀 사실무근인 것 같다. 몇몇 서울대 관계자에게 물어보니, 최 교수에 대한 찬반 이부는 접어두더라도, 대학내에서는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고 밝히고 있는 점에서도 그의 성실함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한가지 분명히 해둘 점은 노자키씨의 글이 나를 향한 것이지 두 전직 대통령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다.

시정 잡배들이 선술집에서 만들어낸 듯한 이런 소문에 언짢아할 분들이 아니란 것은 짐작하지만 혹시라도 심기를 어지럽혔을까봐 소심한 성격 탓에 부연하는 것이니 양해 있으시기를.

자, 이런 소문이 있었다는데 본인은 그 집들의 위치조차 모르고 있다면 좀 미안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렇지만 두 분 집을 곁에서나마 보게 된다면 전공자의 처지에서 한마디 없을 수는 없겠고 그러자니 생존한 전직 대통령의 집터에 대해 뭐라 말하기도 난처한게 사실이다.

나쁘게 말하면 땅에 대한 모독이 될 터이고 좋게 말한다면 일종의 아부가 될 수 있기에, 게다가 두 분 다 역사의 뒤로 물러난 경우라 이미 우리는 그들의 과거와 현재를 잘 알고 있지 않은가.

터를 보아 그 집 주인의 운세를 파악하는 일은 나도 심히 꺼리는 바이지만 그렇다고 뻔히 아는 사실을 터의 탓으로 돌리는 것도 마땅치가 않다.

그래서 그냥 연희동만 둘러보기로 한다.

한데 문제가 생겼다.

새해 아침 신문을 보니 국회의원 세명이 당적을 옮긴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해괴하기 짝이 없는 일인데 그런 행위도 우국충정이라니 입이 다물어지지를 않는다.

청와대는 몰랐다고 하지만 어느 국민이 그 말을 믿겠는가?

나는 이 연재 3회에서 청와대 터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희망을 갖고 긍정적인 쪽으로 평가하며, 특히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헌사의 의미로 내 전공상의 주장을 굽혀 가면서까지 청와대의 주인 대통령의 역할이 중요한 까닭을 강조한 뒤, "모두들 희망을 갖자"고 한 적이 있다.

( 한경 2000년 12월14일자 7면 )

왜 전두환 노태우 두 전 대통령 얘기를 꺼내다가 이런 말로 돌아서게 되었는지 독자들은 짐작하리라 믿는다.

어떻게 청와대 주인만 되면 국민을 아이들 대하듯 하는지, 소위 권위주의적인 인물로 변해 가는지를 다시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미 나가버린 내 주장을 바꾸고 싶지는 않지만 청와대 터는 정말 문제가 많다는 점만은 다시 확인이 되기에 첨언해 둔다.

이러니 연희동 답사는 그저 한가한 기행에 머물 수밖에.

조선총독부 때부터 지금까지 청와대 주인들의 말로를 상세히 소개한 바 있음을 상기해 주시기 바란다.

서울은 북악산 연맥이 동서로 가로지르는 형태의 주산이다.

그 주맥(主脈)은 당연히 청와대를 지나 경복궁 근정전에서 혈(穴)을 맺는다.

그리고 경복궁은 왕이 기거한 기간이 짧기는 하지만 조선 왕조의 정궁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또 하나의 정맥(正脈)이 있으니 바로 창덕궁을 일궈낸 북악산의 동쪽 가지이다.

이 줄기는 북악산 길 328 고지에서 삼청공원으로 이어져 창덕궁에 혈을 틀게 된다.

그러니까 서울의 주산 북악산은 두 개의 혈을 만든 셈이고 그 좌우를 낙산과 인왕산이 청룡과 백호로 옹위하는 형세이다.

그리고 그 사이로 특이한 지세를 만들며 내려온 곳이 운현궁인 바 여기에 대해서는 회를 달리하여 언급하기로 한다.

북악의 백호인 인왕산은 무악재에서 절맥(節脈)을 이뤘다가 안산에 닿고 그 중 남서쪽으로 뻗은 가지가 모래내를 따라 연회고지를 거쳐 와우산에 이르는 긴 줄기를 만들고 있다.

그 안에 연희동과 동교동이 포함된다.

백호는 명당의 서쪽으로 재부(財富)를 상징하고 여자들이 잘 된다는 속설을 갖고 있다.

내 알 바 아니지만 혹 호사가들의 관심이 있을까봐 언급은 해둔다.

연희동 명의 유래가 된 연희궁은 태종 이방원의 노년 불안감이 조성한 이궁(離宮)으로 짐작된다.

그는 피비린내를 풍기며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태종 18년(1418) 6월 세자를 바꾸자마자 8월에 왕위를 세종에게 넘기고 창덕궁으로 옮겨간 것을 보거나, 죽은 후 한강을 건너서 자기 산소자리를 잡은 것이 모두 그의 그런 불안감의 반영이었다고 본다.

본래 지기(地氣)는 물을 건너지 못하는 법(界水則止))이기에 원혼이 자신의 혼령을 따라잡지 못하게 한강을 건너 현인릉에 자리를 잡은 것이라 믿는다.

연희동-동교동-청와대로 이어지는 새해 벽두의 생각들이 어찌 이리 어수선하고 불안한지, 글도 생각을 닮아 횡설수설이 된 느낌이다.

[ 본사 객원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