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밖에 있는 멍석만한 언덕빼기나마 그냥 놀리기가 싫어서 도라지를 몇뿌리 심었더니 첫해부터 꽃이 피어 제법 화초 구실을 했다.

도라지는 한 이태쯤 자라야 쓸만하기에 가을엔 가랑잎을 두툼하게 덮어주어 웃거름 노릇을 하게 했다.

그런데 이듬해 봄에 보니 언제 날아들었는지 도라지 틈에 더덕씨가 뿌리를 내려 덩굴을 감아올리고,그 다음해 봄에는 또 잔대씨가 뛰어들어 줄기를 세우는 것이었다.

보아하니 꽃이 훤하기는 도라지가 제일이고,냄새가 향기롭기는 더덕이 제일이며,잎과 줄기가 거쿨지기는 잔대가 제일이었다.

그러나 도라지대는 가늘어도 더덕덩굴에 휘감겨서 휘는 법이 없었고,더덕덩굴은 여릴망정 잔대잎에 치어서 그늘에 드는 법이 없었다.

잔대 역시 너무 웃자라거나 늦자라지 않아서 옆의 도라지나 더덕하고 사이가 구순했다.

도라지와 더덕과 잔대는 다 같이 초롱꽃과에 속한다.

꽃이 피는 때는 물론 꽃의 모양이나 빛깔도 비슷하다.

또 해독제나 거담제로 사람에게 약이 되거나 반찬이 되는 부분이 뿌리라는 것도 같다.

밭에 심어서 먹거나 파는 사람들이 뿌리 채소의 하나로 여기는 것도 무릇 그런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이 세 근채류 내지 약초류가 터전을 놓고 텃세를 하거나 따돌리지 않고 서로 구순하게 사는 것은 다 같은 초롱꽃과니 통꽃류니 하는 동류의식 때문이 아닐 것이었다.

또 꽃의 맵시나 향기로 값을 치는 화초류가 아니기에 그러는 것도 아닐 것이었다.

인삼이나 산삼이 그렇듯이 이들의 뿌리는 크지도 미끈하지도 않다.

향기도 흙 속에 숨은 뿌리에서 난다.

잎이나 줄기도 과채류에 비하면 오히려 초라한 편이다.

따라서 몸값이 뿌리에 있기에 그런지 생명력이 강하다.

모종을 내도 열이면 열이 뿌리를 잘 내린다.

짐작에 근본이 산야초인데다 오랜 야생에서 다져진 생명력이 곧 적응력의 바탕인지라,서로가 화해와 상생의 뜻을 터득하여 보기좋게 사는 모양이었다.

도라지를 심은 언덕빼기에 불청객으로 날아든 더덕과 잔대가 뿌리를 내리고 의좋게 사는 것은 저마다 야성을 되살려 야생시절로 되돌아간 것이나 다름이 없다.

나는 참견을 하지 않기로 했다.

호미로 매지도 않았고 가랑잎으로 덮어주지도 않았다.

야생으로 돌아가면 향기만 짙어지는 것이 아니라 맛과 약효도 훨씬 좋아진다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식물사회학의 바탕이 식생에 있다면,인간의 공동체적인 삶이나 그 뜻을 되살리는 데에는 어떤 수가 있을 것인가.

나는 그에 관하여 아는 것이 없다.

아는 것이 있다면 공동체 어쩌고 할 주제가 아니란 사실 뿐이다.

그렇다고 하여 새해를 맞은 마당에 팔짱만 끼고 있으면 그만이란 말인가.

더구나 신사년은 나에게 특별한 해가 아니던가.

특별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어느덧 갑년.

공자는 귀로 듣기만 해도 뜻을 알았다는 이순에 이르른 것이다.

그전 같으면 환갑 잔치를 차린다고 은근히 부산을 떨 즈음에 그냥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덜 미안하라는 법도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생각한 것이 동심을 되살렸으면 하는 것이다.

조선조 중기의 실천적 민중사상가였던 이토정 선생은 그의 "대인설"에서 대인 군자란 평생토록 벌거숭이의 마음(赤子之心)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적자지심은 곧 동심이다.

머리에 서리가 내린 뒤에도 동심을 잃지 않고 사는 사람이 바로 대인이라는 것이었다.

인간은 야성을 되살리기가 수월치 않다.

무엇보다도 다시금 야생으로 돌아갈 수가 없는 탓일 것이다.

하물며 환갑을 맞이한 나이일 것인가.

그러나 어려서 부끄러운 줄 모르고 동무들과 벌거벗고 뛰어다니며 놀았던 동심의 회복은 꼭 불가능한 것만도 아니다.

아니,도대체 지금부터 어떻게 때묻지 않고 산다는 말인가.

어려운 일이다.

그러기에 더 묻지나 않았으면 한다는 것이다.

더만 묻지 않아도 새로 시작할 수가 있다.

특히 갑년을 맞이한 멤버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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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약력=

<>1941년 충남 보령 출생
<>주요작품: "관촌수필""우리 동네""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등.
<>요산문학상 만해문학상 동인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