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까지 여러 차례 청와대 터의 문제점을 지적해 왔다.

그 골자는 일제가 조선 왕국의 수도인 서울의 정룡(正龍) 북악산이 생기를 내뿜는 결정적인 장소, 즉 용의 목구멍에 해당하는 지금의 청와대 자리에 총독 관저를 짓고, 용의 입에 해당하는 자리에 총독 집무처인 중앙청을 지음으로써 용의 목을 누르고 입을 틀어막는 만행을 저질러 왔다는 내용이었다.

그곳 주인들의 말로 또한 비참했음이 "땅은 거짓도 없고 용서도 없다"는 풍수 금언을 실감케 하는 대목이라 자주 인용해 왔다


청와대가 지어진 것은 1927년 제3대 총독이었던 사이토 마코토라는 자 때였다.

그의 서울 도착은 강우규 열사에 의하여 피로써 막을 연다.

조선 총독을 한번 더 한 그는 1932년 일본 총리대신 자리에 오르지만, 1936년 2.26 사건으로 자신보다 더 파쇼적인 젊은 장교들에 의하여 살해당하고 만다.

청와대의 첫 거주자가 피로 시작하여 피로 끝냈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뭘까?

사이토의 뒤를 이은 제4대 총독 야마나시 한조는 군 장교 시절부터 돈을 좋아해 ''배금장군''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었다고 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소위 야마나시 총독 독직사건에서 5만원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 입건, 구속되었다가 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총독 자리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말하기도 지겹다.

이제 간단히 다음 자들의 말로를 정리하자.

5대는 3대 사이토가 다시 맡았으니 더 말할 것이 없고, 6대 우가키 가즈시게는 2차대전이 끝난 후 공직추방령에 의하여 1953년까지 은퇴했다가 참의원에 당선되었으나 병으로 의정활동도 제대로 못하고 사망.

가장 악랄했던 총독 7대 미나미 지로는 2차대전 후 전범 재판에서 무기형을 선고 받고 수감, 1954년 질병 때문에 풀려났으나 다음해 병석에서 사망.

8대 구이소 구니아키는 연합군의 군사 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지목, 1948년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옥사.

마지막 9대 아베 노부유키는 미군 하지 중장에게 항복문서를 전달하는 수모를 겪은 후에, 치사하게도 자기 책임 아래 있던 일본인들의 귀환을 뒤로 하고 자신의 아내와 손자 두명을 데리고 부산에서 짐을 가득 실은 80t짜리 배를 타고 달아나다가 폭풍을 만나 물건을 다 버린 뒤 부산으로 되돌아오는 해프닝을 연출했다.(친일문제연구 제5집, ''조선총독 10인'' 참조)

대한민국 수립 후 청와대 주인들의 뒷얘기는 다들 알고 있는 일이니 새삼 거론하여 독자들의 심기를 불편케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승만은 객사했고 윤보선은 어쩐 일인지 국립 현충원에 묻히기를 거부하는 예외를 치렀지만 사실 그는 실권자가 아니었으니 집 주인이라기보다 세입자라 해야 할 것이다.

위에서 정리한 일본인 총독들의 말로와 비교해 보면, 누구라도 이거 뭐가 잘못된 것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청와대 본관은 사이토 총독이 터를 잡은 그곳이 아니다.

지금은 흔히 구본관이라 불리는 곳으로 사용되지 않는다고 한다.

현재 본관은 노태우, 김영삼 전 대통령을 거쳐 현재에 이른다.

과연 청와대 터는 문제가 많은가?

결론적으로 그렇다.

하지만 구본관은 북악산 정맥(正脈)에서는 약간 벗어난 곳으로 북악의 기를 본격적으로 받을 자리가 아니었다.

사실 북악의 기는 대단한 강기(强氣)다.

웬만한 사람이 견딜 자리는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정맥에서 벗어났으니 잘된게 아니냐는 지적이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풍수의 정혈법을 오해한데서 비롯된 일이다.

사람에 비유하자면 치명적인 혈(穴)일수록 정확하게 찾아 침을 꽂아야지 조금이라도 빗나가면 오히려 크게 해를 입히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지금 청와대는 여러가지 시설물들을 정리하거나 이전하는 조치들을 취하고 있다.

그 근본 취지는 "자연친화적이고 국민에게 가까이 다가서는 청와대로"라는 것이 될 듯 싶은데, 정말 잘 된 일이다.

나는 고등학교를 청와대 근처에서 다녔기 때문에 누구보다 기억이 선명하거니와 청와대 쪽으로는 솔직히 가고 싶은 생각이 나지를 않았다.

한마디로 너무나 권위주의적인 터잡기와 공간 배치 때문이 아니었을까 짐작하고 있을 따름이다.

지금 북악 정상에 있던 군 시설물은 정리되었고 청와대 서쪽에 있는 칠궁은 내년 5월이면 일반에 공개되기 위하여 공사가 진행중이다.

칠궁은 영조의 생모이자 숙종의 후궁이었던 숙빈 최씨의 사당으로 처음에는 육상묘라 부르다가 후에 격을 올려 육상궁 또는 육궁으로 변했고 나중에 왕비는 아니지만 왕이나 왕자를 낳은 후궁의 신위를 모시면서 칠궁이 된 곳이다.

서울 살면서도 칠궁이란게 있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여하튼 칠궁이 개방되면 사람들이 몰려들 테고 이것은 청와대 터의 강기를 눌러주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엉뚱한 얘기 한마디를 덧붙인다.

이혼을 눈앞에 둔 어떤 부부가 모든 노력을 기울여 파경을 막아보려 했다.

상담전문가도 만나보고 정신과 전문의도 만나보고 친구나 친지의 조언도 들어봤지만 그야말로 백약이 무효였다.

그 때 한 풍수사가 이 부부의 침실을 보고 "침대를 저렇게 놓았으니 잉꼬라도 헤어질 수밖에 없겠다"고 충고했고 그 부부는 침대를 옮긴 후 금실이 좋아졌다는 홍콩 풍수의 한 얘기다.

이것은 풍수가 환경심리학적으로 매우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실제 예이다.

지금 우리 경제는 무척 어렵다.

이제 나는 청와대 터의 나쁜 점이 사라졌다는 것을 풍수적으로 밝힘으로써 국민들에게 풍수의 환경심리적 효과를 내보고자 또 다시 청와대 터 얘기를 꺼낸 것이다.

풍수가 진정 중시하는 것은 땅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그렇게 받아들인다.

땅은 그저 무대일 뿐이다.

그 위에서 이루어지는 역사는 각본일 터이고 그 위에서 일을 꾸려 나가는 사람은 배우이다.

무대는 중요하다.

그러나 그 무대가 좋은 것이라고 해서 엉터리 배우들이 비윤리적 각본을 가지고 공연을 한들 좋은 연극이 될 까닭이 없다.

반대로 훌륭한 배우들이 인간적인 각본을 가지고 연기를 한다면 비록 무대의 품격이 좀 떨어진다 하더라도 크게 비난받을 연극이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나라의 경제 사정은 말이 아닌 모양이다.

은행이나 기업에서 일하는 친구나 후배들 얘기를 듣다보면 거의 절망에 가까운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문화평론가 고길섶의 정곡을 찌르는 지적대로 우리는 지금 "오른 손에 핸드폰, 왼 손에 깡통"을 든 형국이다.

대통령은 형식적으로나 실질적으로 나라의 방향을 결정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국민에게 희망을 심어주는 역할일 것이다.

대통령이 일하며 살고 있는 청와대는 이제 국민의 정부라는 표방 그대로 일반에게 다가서 있으며 그 터가 본원적으로 지니고 있던 풍수적 결함은 본관의 이전, 권위주의적 시설의 철폐와 정리, 과감한 개방, 특히 대통령 개인의 강인한 인기(人氣)와 인동초(忍冬草) 같은 삶의 역정이 쌓아올린 역동성으로 극복될 것이다.

본래 청와대 자리는 논을 비롯하여 습기가 많은 땅이었다.

좀 잡술의 냄새가 풍기는 얘기지만 수생목(水生木)이라 본관 건물은 나무로 지었다면 좋았을텐데 시멘트로 지어져 있다.

하지만 시멘트를 금으로 친다면 금생수(金生水)가 되니, 이것은 결국 나무로 지으면 사람이 땅의 덕을 보지만 철근 시멘트 건물은 반대로 사람이 땅을 조절하는 형세가 된다.

청와대의 주인 대통령의 역할이 더욱 중요한 까닭이 여기에도 있다.

모두들 희망을 갖자.

본사 객원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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