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신고전학파 경제학에 익숙한 사람들은 경제를 여전히 기계로 인식하여 헐렁한 나사는 드라이버로 조이고,녹슨 부위는 기름칠 하고,낡아빠진 부분은 도려내 그 부분을 새로운 철판으로 용접하면 모든 것이 새로워질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경제란 신고전파 경제학이 생각하는 것처럼 이리붙였다 저리 붙였다 할 수 있는 기계덩어리가 아니다. 경제는 과거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생명체로서 다양하게 적응하고 혁신하면서 진화하는 살아있는 유기체다''

최근 출판된 ''경제진화론''이란 책의 저자(유동운 부경대 교수)가 서문에서 밝힌 내용이다.

경제진화론의 내용에 대해 제대로 알지는 못하지만 어쩌면 최근 우리경제가 겪고 있는 갖가지 진통의 원인과 처방을 암시하는 듯해 음미해 볼만한 대목이 아닌가 싶다.

지금 우리경제가 당면한 최대과제는 구조조정이다.

외환위기를 겪은지 3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철저하고 신속한 구조조정이 이뤄지지 않고 있어 IMF체제와 같은 경제위기를 다시 맞이할 가능성이 있다는 게 경제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마디씩 지적하는 문제점이다.

사실 외환위기 이후 기업 및 금융 구조조정이 강도높게 진행돼온 측면도 없지 않다.

대기업은 물론 상당수의 금융기관까지 퇴출조치가 이뤄졌다.

기업들의 부채비율도 낮아졌고,수익성도 높아졌다.

그런데 아직도 구조조정이 문제라니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사실은 답답하게 생각하는 것이 더 큰 문제가 아닌가 한다.

정부는 물론 모든 국민들이 경제개혁,즉 구조조정을 낡아빠진 기계 몇대를 갈아치우는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게 아니냐는 의구심 때문이다.

경제진화론을 들먹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살아있는 유기체인 경제가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면서 새로운 유기체로 진화하기까지엔 꽤 오랜 세월이 필요하다.

그런데 정부는 물론이고 모든 경제주체들도 그같은 점을 간과하고 있는 것같다. 경제개혁을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추진하려는 노력이 부족하다는 얘기다. 경제개혁에 대한 정부 정책이 조급할 뿐만 아니라 비전이 결여돼 있고,일관성이 없다는 세간의 비판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기업 및 금융구조조정을 연말까지,또는 내년 2월까지 마무리하겠다는 정부의 약속은 그런 점에서 오히려 정책의 신뢰성을 떨어뜨리기에 충분하다.

구조조정은 일정 시한내에 끝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환경조건의 변화에 따라 경제가 끝없이 진화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영원한 숙제라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정부가 개입하는 구조조정의 시한을 설정한 것으로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면 구조조정은 기업들이 자율적으로 추진하는 것이란 그동안의 정부해명과 논리적 모순이 발생해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경제개혁은 기업 및 금융구조조정이 전부는 아니다.

오히려 정치 사회 문화 등 경제를 둘러싼 생태계의 환경변화에 영향받는 부분이 더 크다. 부실기업을 퇴출시키고,은행을 합병시켜 대형화한다고 하더라도 사회환경이 변하지 않으면 또 다시 부실해 질 수밖에 없다. 정쟁을 일삼는 정치,책임회피에 익숙한 관료사회,초법적 집단행동이 난무하는 노동쟁의,편법이 통하는 사회풍조 등 경제활동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법과 제도,그리고 관행들이 함께 변하지 않으면 지금까지 이뤄놓은 경제개혁마저 물거품으로 변할 가능성도 있다.

최근의 경제에 대한 위기감 증폭은 따지고 보면 경제의 취약성 보다 사회적 무질서에서 오는 불안심리가 더 크게 작용했다는 분석도 없지 않다.

진화란 스스로 변하는 것이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면 경제개혁은 결코 우격다짐으로 추진할 일은 아니다.

경제는 살아있는 유기체라는 인식아래 구조조정을 시장자율에 맡기되 법과 제도 등 환경조건을 개선함으로써 기업 스스로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정부가 내년도 경제정책 운용방향을 검토하면서 특히 유념해야 할 대목이다.

기업가들이 본연의 혁신적 기능을 발휘할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주려는 적극적인 지원체제로의 전환이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