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누구도 집권 여당인 자민당(LDP)의 노쇠한 정치가들에게 그다지 큰 기대를 걸진 않는다.

하지만 지금처럼 땅바닥에 떨어진 기대수준을 놓고 볼 때 이제 집권 3개월이 된 모리 요시로 총리의 내각에 대해서는 실망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 국민과 언론은 모리 총리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다.

심복이었던 나카가와 히데나오 관방장관이 최근 섹스 스캔들로 사임하면서 모리 총리의 입지는 더욱 약해졌다.

자민당의 장기 집권 역사 속에서 일본 총리의 인기가 이처럼 바닥에 떨어진 적은 없었다.

게다가 일본의 비틀거리는 경제는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 있다.

경제가 아직도 취약한 구석이 많은데다 개혁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모리 내각은 우유부단한 자세로 이런 사태를 묵과하고 있다.

허겁지겁 인사 명령만 내리고 있을 따름이다.

일본 금융시장의 신뢰를 수습하는 중책인 금융재생위원장 자리에 올해 들어서만 모두 4명이 임명됐다.

모리의 마지막 선택은 올해 81살이나 된 노장 아이자와 히데유키 전 경제기획청장관.

일본이 맞닥뜨린 진짜 위기는 정권 자체의 정통(적법)성 문제다.

자민당을 주축으로 한 연립정권은 대다수 국민의 지지를 전혀 반영하고 있지 않다.

일본에서는 왜곡된 투표 시스템 때문에 농촌 거주자들이 도시민들에 비해 무려 3배나 많은 투표권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대부분 각종 세제혜택과 보호무역조치라는 정부의 미끼에 현혹돼 있다.

도시에 사는 대다수는 터무니없는 대가를 치르며 살고 있다.

고령층은 젊은이들의 희생으로 직업과 연금을 보장받고 있으며 기업들은 정부측 말만 듣는다.

소비자들은 철저히 무시된다.

그렇다면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른 것일까.

한때는 공동체 의식이 일본 국민들을 하나로 묶어 조화를 이룬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는 시절이 좋을 때 얘기다.

상황이 좋지 않을 때 공동체 의식은 행동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쓰인다.

어느 누구도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는다.

은행장들이 불법 대출을 해도 처벌을 받지 않고 기업체의 총수들은 회사를 말아먹고도 명예스럽게 은퇴한다.

이런 상황에서도 야당들은 시원한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일본 제1야당인 민주당은 전 자민당 출신들로 꽉 차 있다.

이젠 자민당조차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민주당은 자체적으로 내실을 다지기에도 바빴던 게 사실이다.

어쩌면 일본 정계 개혁의 기수는 여당 내부에 있을지도 모른다.

유력한 차기 총리 후보인 가토 고이치 전 자민당 간사장을 비롯한 개혁 세력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고 보다 젊고 신선한 인물들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정권을 잡기까진 시일이 걸릴테고 그 때까진 대책이 없다.

유권자들이 주요 여·야당들에서 등을 돌리고 무소속 정치인들에게 표를 던지거나 아예 정치에 무관심해지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자민당은 선거시스템을 악용해 권력을 유지하고 국민의 눈으로부터 치부를 가리기 위해 갖은 애를 다쓰고 있다.

정통성을 되찾지 않고서 자민당은 어느 누구의 비위도 거스리지 않으려는 나약한 당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외부에서는 일본의 대표적인 국수주의자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 도지사같은 인물이 자신의 체제를 더욱 공고히해 권력을 장악하게 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일본이 최근 외국 문물을 적극 수용하는 추세라는 점이다.

또 다른 긍정적 측면은 새로운 정치 질서가 잡힐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는 점이다.

가장 훌륭한 해결책은 아마도 정당들을 재정립,색깔을 분명히 함으로써 유권자들에게 보다 분명한 선택의 여지를 주는 것이라 여겨진다.

정리=고성연 기자 amazing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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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영국의 경제전문지 이코노미스트 최근호에 실린 사설을 정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