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성호는 창가로 가 밖을 보면서 생각을 계속했다.

IMF사태가 발생했을 때,황무석이 솔선해 사표를 제출한 이유가 이제야 이해되는 듯했다.

진성호는 그 당시 황무석이 박인호 사장을 비롯한 다른 중역의 사표제출을 유도할 목적으로 황무석 자신을 희생했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하니 실제로는 황무석이 주가조작을 이용해 거액의 시세차익을 본 회사의 현장에서 떠나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의심이 들었다.

진성호는 자신이 의심하는 모든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황무석이란 자를 다룰 때는 신중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57세의 나이에 싱글 핸디를 거뜬히 유지하는 점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황무석은 보통인간이 아니었다.

황무석은 육체와 의지가 강하고 교활하며 교제범위가 넓고 게다가 우수한 두뇌까지 갖춘 인간이었다.

황무석의 주무기는 립 서비스이고,그의 ''입에 발린 말''에 속수무책으로 넘어가는 사람은 역경에 처한 여인 뿐만 아니라 어정쩡한 두뇌를 가진 대부분의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입은 노련한 창녀의 음부와 같았다.

노련한 창녀의 음부가 탕아의 신체적 조건에 따라 자유자재로 조절되듯이,황무석의 입은 듣는 사람에 따라 때로는 동정심을 뿜어냈고,때로는 의협심을 발산했으며,때로는 관대함으로 무장하기도 했고,또 때로는 강인함을 전달하기도 했다.

그리고 황무석은 중요한 보조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돈이었다.

''돈은 강한 목소리를 낸다''는 서양속담이 있듯이,황무석의 입이 제대로 먹혀들지 않을 때는 돈으로 대신 처리한다는 것을 진성호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황무석이 가장 강력한 설득력을 발휘할 때는 역시 그의 주무기인 입과 그의 보조무기인 돈이 합쳐졌을 때였다.

진성호에게 가장 인상적으로 남았던 것은,황무석이 아내와의 대화 중 아내가 언급한 주가조작에 관한 정보가 녹음된 테이프를 갖고 있는 수사관을 설득할 때였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그가 사용한 수법은 실제로 기상천외한 것이었다.

수사관에게 주기로 한 1백만원짜리 수표 30장 중 ''받지 않으면 필요없다''며 1백만원짜리 수표 몇 장을 가스불 위로 던진 사건은 그의 두뇌가 아니면 나올 수 없는 아이디어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황무석이 바로 그 사건 때 혼신의 힘을 기울인 것은 주가조작 사실이 드러나면 자신의 비밀도 드러날 것이므로 자신이 살아남기 위한 행동이었음이 확실해졌다.

진성호는 황무석을 일단 만나보기로 했다.

그는 황무석이 경영을 맡고 있는 골프장으로 전화를 걸었다.

"황 사장님 외출하셨습니다"

여직원이 전화를 받았다.

"내일 아침 몇시에 출근하시나요?"

"새벽 6시면 출근하세요. 출근 즉시 필드를 돌아보시지요"

진성호는 더이상 묻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내일 새벽 골프장으로 가 필드를 걷고 있을 황무석과 맞닥뜨려볼 작정이었다.

그러나 상대가 황무석이므로 그에게서 진실을 실토하도록 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님을 진성호는 알고 있었다.

어떤 드라마틱하고 그로테스크한 방법을 필요로 했다.

그는 문득 어머니 집에서 5대째 키우는 진돗개 한 쌍이 생각났다.

내일 새벽 골프장으로 개를 데리고 가기로 작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