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 직후 서울에서 열렸던 세미나에서 미국 MIT의 루디 돈부시 교수는 위기극복을 위해 한국정부가 보다 과감하게 금융기관과 기업들을 퇴출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우리쪽의 반론이 뒤따랐다.

한국의 경우 고도성장의 후유증으로 대부분의 금융기관과 기업이 취약한 상태에 있는데 선진국의 엄격한 잣대를 갑자기 들이대어 시장에서 몰아 내는 것은 가혹한 조치라는 내용이었다.

그러자 그는 음주운전 단속의 예를 들면서 자신의 입장을 변호했다.

"법정 기준을 넘어선 음주운전자는 무조건, 그리고 모조리 잡아내어 운전을 못하게 해야 한다. 남보다 좀 덜 마셨다거나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고 해서 봐 주다가는 대형사고가 생길 것이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논거였다.

반면에 하버드대학의 제프리 삭스 교수는 당시에도 이와 다른 주장을 내세웠다.

IMF가 권하는 긴축정책,고금리정책, 기업과 금융기관의 대규모 퇴출 정책은 외환위기의 성격과 한국경제의 특성을 무시한 처방이라고 지적했던 것이다.

지난 주말 한국을 찾았던 그는 퇴출규모가 너무 커서도 너무 작아서도 안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너무 크게 되면 산업기반과 국가경쟁력을 뿌리부터 뒤흔들게 될 것이고 국민들로서도 감당키 어렵게 돼 구조조정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퇴출없이 기업 모두를 살리려 하다가는 일본처럼 경제가 장기침체에 빠지고 만다.

그는 정책당국이 퇴출규모를 적정선에서 결정하려면 정교한 기술이 필요하다는 점을 특히 강조했다.

이번 11·3 퇴출 판정이 돈부시 교수의 주장을 따르지 않은 것만은 확실하다.

기준이 엄격했더라면 2백87개 심사대상기업 모두가 퇴출될 수도 있었겠지만 52개 기업만이 정리대상으로 결말이 났다.

그중에서도 청산은 18개, 법정관리는 11개에 그치고 있다.

그렇지만 이정도 규모가 적정한 수준인지, 또 그러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 정교한 기술이 구사됐는지 하는 문제들은 앞으로도 두고두고 논란거리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정책당국과 채권은행단은 그동안 너무 눈치를 봐가며 일을 처리해 왔다.

기업구조조정을 차일피일 미뤄오다 외국인투자자들과 금융시장의 압력에 떼밀린듯한 인상을 주고 있으며 퇴출규모도 자신있게 결정했다기 보다는 이들과 여론의 반응을 살펴가며 조절했다는 감을 지우기 어렵다.

당국의 어정쩡한 자세는 현대건설과 쌍용양회 처리에 있어서 두드러졌다.

조건부 회생이라는 모호한 결정을 내려놓고 시장의 해석이나 반응이 신통치 않자 황급히 홍보에 나서면서 기업들을 더욱 압박해 가는 듯하다.

이번 조치와 관련된 또 하나의 문제점은 부실기업문제를 모아두었다가 한꺼번에 처리하려 하다보니 이벤트성 행사가 돼버렸다는 것이다.

체면치레를 위해 숫자를 불리는 일이 생겼고 결국은 법원쪽과도 마찰을 빚게 됐다.

이미 법원에 의해 퇴출이 결정된 미주실업 등을 다시 퇴출대상에 집어 넣는가 하면 현재 법정관리가 진행중에 있는 기업들을 법정관리대상으로 분류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무더기 퇴출판정 방식은 경제나 금융에 막대한 충격을 주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대규모의 조직적 저항까지 유발하게 되므로 마무리가 제대로 될 수 있을 지도 걱정스럽다.

또한 이번에 살아난 기업들에는 잘못된 메시지를 줄 염려도 크다.

일단 한고비를 넘겼으니 당분간은 또다른 퇴출이 없으리라는 판단에서 자세가 흐트러질 수도 있는 것이다.

정부당국이 또 하나 염두에 둬야 할 일은 기업이나 금융부문의 구조조정과정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이고도 힘든 과제는 노조문제의 해결이라는 점이다.

그럴싸한 내용과 명단을 발표하고 오너를 밀어낸다 하더라도 근로자의 감축없이 성과있는 구조조정을 기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외국인투자자들이 특히 눈여겨보는 대목이 바로 이것이다.

이미 퇴출결정이 내려진 기업의 근로자들은 세를 모아 강력한 실력행사에 나설 뜻을 비치고 있다.

앞으로 구조조정이 예상되는 공기업과 금융기관의 노조들도 저항의 뜻을 분명히 하고 있다.

노조를 설득하고 때로는 맞서가면서 개혁계획을 밀고 나갈 각오와 의지가 없다면 구조조정이나 이를 통한 경쟁력 향상은 한갓 요란한 구호에 그치고 말 것이다.

< 본사 주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