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홍상화

백인홍은 어떤 식으로든지 박정희 정권에 상처받은 나상훈의 마음을 풀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진심으로 동정의 뜻을 표하고 싶소"

백인홍이 나상훈을 향해 소리쳤다.

"당신의 동정 따윈 필요없어.이 씨발놈아! 내 청각과 건강을 되돌려줄 방법을 찾아보란 말이야"

"박정희는 이미 복수를 당했소.박정희에게는 가장 잔인한 복수였소.그게 뭔지 아오?"

백인홍의 말에 나상훈은 아무런 반응을 나타내지 않았다.

"박정희가 자신의 목숨보다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무엇이겠소?…자신의 명예와 자신의 핏줄을 이어받은 유일한 아들의 명예일 거요.

그 자신과 아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소?…자신은 젊은 여자의 품속에서 숨을 거뒀고,그의 아들은 사창가에서 마약을 하다가 경찰에 체포되지 않았소.지하에 있는 박정희는 지금도 통곡하고 있을 거요.

그 이상 어떻게 복수할 수 있겠소?"

잠시 정적이 컴퓨터실 안을 짓누르고 있었다.

갑자기 문 쪽에서 나상훈의 흐느낌이 정적을 깼다.

그 흐느낌 속에 백인홍은 김경식을 일으켜 세웠다.

그들은 서로 의지하며 문 쪽으로 걸어나갔다.

그리고는 그곳에서 흐느끼고 있는 나상훈을 일으켜 세웠다.

세 사람은 함께 컴퓨터실을 나왔다.

그들이 컴퓨터실 밖으로 발을 내디뎠을 때 정문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는 두 집단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정문 바깥쪽에 있는 노조측 집단이 그들 세 사람을 보았는지 더 요란스러운 구호를 외쳐댔다.

나상훈이 그 외침에 갑자기 정신이 들었는지 자신을 부축하고 있던 백인홍은 밀쳐버리고 흐느적거리던 몸을 똑바로 세우는 동시에 핏발 선 눈으로 백인홍을 응시했다.

백인홍은 그의 표변에 움찔했다.

나상훈이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냈다.

그리고 뚜껑을 열고 불을 켰다.

이글거리는 증오심으로 활활 불타오르는 나상훈의 눈빛이 드러났다.

"당장 공장문을 여시오.그리고 폐업을 취소한다고 여기서 약속하시오"

나상훈이 백인홍 얼굴 앞으로 라이터 불빛을 들이대며 소리쳤다.

백인홍은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지었다.

카메라 플래시 세례가 정치인에게 위선을 유발하듯이,관객의 박수소리가 예술인에게 오만함을 이끌어내듯이,투쟁적 구호는 나상훈 같은 자에게 증오심을 불러일으킨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안하겠다면…"

백인홍이 나직이 말했다.

"라이터를 컴퓨터실에 던질 거요"

나상훈이 말한 후 컴퓨터실 쪽으로 가 창문을 열고 그 옆에 섰다.

"당신이 라이터를 던지면 나를 해방시켜주는 거야.그리고 당신은 입만 살아있지 그럴 용기도 없는 자야"

백인홍의 말이 끝나자 나상훈이 라이터를 컴퓨터실 안으로 던질 자세를 취했다.

김경식이 ''안돼요,선배님'' 하면서 그에게 달려들었다.

라이터를 뺏으려는 김경식과 뺏기지 않으려는 나상훈의 몸이 뒤엉킨 순간 불켜진 라이터가 퉁겨져나가 컴퓨터실 창안으로 떨어졌다.

순간 컴퓨터실 안에서 불길이 솟았다.

백인홍은 그 불길을 보며 너털웃음 속에 힘껏 박수를 쳤다.

그동안 자신을 씌운 멍에로부터 드디어 해방된 느낌이 들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