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매각이 무산된 이후 직원들이 풀 죽어 있어요. 빨리 주인이 나타나 공장을 정상가동시킬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한보철강의 근로자대표기구인 "한가족협의회"의 대표인 구자도씨(48)는 2일 한숨을 쉬며 말했다.

충남 당진군 송악면에 자리잡고 있는 한보철강 A지구(45만5천평) 봉강공장에선 매월 9만t의 철근이 생산되고 있다.

하지만 조성중 중단된 74만여평 B지구의 무성한 잡초 위에선 녹슨 기계부품이 나뒹굴고 있다.


◆철강업계의 딜레마=매각 무산으로 외환위기의 악몽을 불러일으켰던 한보철강의 처리 문제는 한국 철강산업을 구조조정의 폭풍속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뜨거운 감자''다.

한보철강은 지난 97년 1월 부도후 7개월 뒤부터 최장 20년간의 법정관리에 들어간데다 신규 자금 수요가 없어 당장 부실기업 퇴출 명단에 포함될 가능성은 적다.

하지만 80년대말 신도시건설 때 과잉 설비투자에 나섰던 철강산업계가 본격적인 구조조정을 외면하고 있는 현실에서 한보철강은 재매각이 성사되든 실패하든 간에 한국 철강산업엔 딜레마다.

박건치 한국철강협회 부회장은 "한보철강의 주인을 찾아줘 공장이 돌아가더라도 호조를 보였던 세계 철강경기가 내년부터 꺾어지리란 전망이어서 국내 철강업계는 생산과잉에 따라 구조조정이 불가피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반대로 4억8천만달러(약 5천4백50억원)에 산다는 계약 이행을 믿었다가 지난 9월말 네이버스 컨소시엄에 ''농락''당한 것처럼 또다시 매각이 실패할 경우 국가 신용도 추락으로 한국 경제가 타격을 받을 건 불보듯 뻔하다.

P·I·D사 등 경쟁 철강업체들은 "한보철강이 재매각돼 정상 가동되면 공급과잉으로 철강업계가 구조조정 회오리에 휘말릴 수 있다"고 지적하면서 "설비를 뜯어 고철덩어리로 팔아버리는 게 가장 경제적인 해법"이라며 5조원을 삼킨 한보철강에 대해 극단적인 처방책을 제시했다.

반면 한보철강 나영무 상무는 "설사 한보철강 설비를 고철로 국제시장에 팔더라도 외국업체가 인수해 조립 가동하면 한국에 경쟁자가 된다"며 "국내 철강업계가 어차피 노후화된 과잉설비를 합리화해야 한다면 한보의 첨단 설비로 대체하는 쪽이 서로 이익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분할매각론 부상=한보철강 매각 주체인 한국자산관리공사는 1차 매각 실패에 따른 김대중 대통령의 질책으로 정재룡 사장이 엄중 경고까지 받자 2차 매각에 비상이 걸린 상태다.

이 회사의 김대성 기업매각부장은 "이달안에 미국 컨설팅사인 부즈 앨런에서 효과적인 매각 방안이 나오면 국제입찰을 통해 내년 상반기까지 재매각을 끝낼 방침"이라고 말했다.

그는 "1차 매각협상과 같은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인수 계약자가 계약 보증금을 내놓도록 하는 것은 물론 인수의지 자금조달능력 경영능력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낙찰자를 선정하겠다"고 설명했다.

자산관리공사는 한보철강 인수에 강한 의욕을 보이고 있는 권호성 중후산업 사장(전 연합철강 사주 권철현씨의 장남)에 대해 "믿을 수 없다"며 신중한 입장이다.

김주한 산업연구원 소재산업실장은 "한보철강 문제는 국내 철강업계의 구조조정 부담을 줄인다는 차원에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며 "철강 경기의 후퇴 국면을 감안해 수익을 낼 공장 일부만을 팔아 정상 가동시키고 나머지 설비는 분할해 외국에 넘기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정구학 기자 c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