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홍상화

백인홍은 자기가 나상훈이 겨누고 있는 공기총의 사정거리 안에 있음을 알았다.

게다가 상처를 입은 백인홍으로서는 그자의 요구를 들어주면서 달랠 도리밖에 없었다.

백인홍이 김경식을 향해 연기를 하라고 손짓했다.

"자본주의는 병들었어.그것도 중병이 들었지.치료할 수 있는 방법은 마르크스주의밖에 없어" 김경식이 마지못해 말했다.

"아니야.환자의 병보다 더 위험한 것이 마르크스주의라는 약이야.환자를 더 고통스럽게 하고 더 빨리 죽이지"

백인홍이 김경식의 말을 받았다.

문 쪽에서 나상훈의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잘했어.아주 잘했어.얼마나 멋진 대사야! 공산주의라는 약이 자본주의의 병보다 더 위험했다는 말이 누구 말인지 알아? 교황의 말이지.그렇지만 교황이 잘못 생각한 거야.진정한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의 병을 고칠 수 있어"

컴퓨터실 안은 잠시 정적이 지배했다.

"자본주의 주구….내 말 들어봐.당신은 왜 불쌍한 노동자들을 착취하면서 부를 쌓으려고 하지? 그렇다고 하루에 다섯 끼를 먹을 순 없잖아?" 나상훈이 타이르듯 말했다.

"성취감을 얻기 위해서요.남자는 성취감을 먹고사는 거요.그 과정에서 경제가 발전하는 거고"

"너희 자본주의 주구들이 성취감을 얻는 사이 노동자들은 병들어가고 있어"

"그렇지 않소.사업으로 성공할 확률은 1백분의 1도 안 되오.평생 편히 지낼 수 있으면서도 사업을 해 패가망신하는 사람이 1백명 중 99명이오"

"너는 박정희보다 더 나쁜 놈이야.그자는 적어도 무지막지했지 간사하지는 않았어"

"왜 박정희에게 원한을 품고 있소? 박정희는 우리의 역사가 필요로 한 인물이었소"

"뭐라고? 박정희가 우리의 역사가 필요로 한 인물이었다고? 이 씨발놈아! 그 자식 때문에 나는 한쪽 청각을 잃었고,궂은 날은 술을 마시지 않고는 온몸이 쑤셔서 견디지를 못해" 나상훈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백인홍은 공기총을 다시 발사할 여유를 주지 않으려면 나상훈에게 계속 말을 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백인홍은 미동도 않은 채 잠자코 듣기만 했다.

나상훈의 말이 이어졌다.

"단순히 그들 마음에 들지 않는 연극을 공연했다는 이유로 끌려갔어.그리고 신문관이 시키는 대로 조서를 써야 했어.조서 마지막에 작가 나상훈이라고 썼는데,신문관이 찢어버리는 거야.서명을 ''자칭'' 작가라고 쓰라는 거야.그건 도저히 할 수 없었어.다시 조서를 쓰고 마지막에 ''자칭''이라는 말은 쓰지 않았지.신문관이 내 뺨을 후려쳤어.조서는 찢기고,나는 다시 조서를 썼어.하지만 앞서처럼 똑같이 ''자칭''이라는 단어는 쓰지 않았어.그것이 밤새 계속 반복되었어.그 사이 나는 한쪽 청각을 잃어버렸지.그런 다음 고문실로 끌려가 물 속에 거꾸로 처박히고 온몸이 시퍼렇게 멍들도록 각목으로 얻어맞았어.그뿐만이 아니야.그들은 내게 고문실 벽에 붙은 오물을 혀로 핥게 했어"

나상훈의 흐느낌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