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에 열린 ASEM회의는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과 함께 축제분위기 속에서 ''서울평화선언''도 채택되고 걱정했던 NGO들의 데모도 폭력사태로까지 번지지 않아 무사히 끝났다.

준비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수고한 덕분이라고 생각된다.

행사준비로 도로를 포장하고 차선을 새로 긋는 과정에서 예산을 낭비하고 교통체증을 유발한다는 일부의 비판이 있었지만,손님접대에 남달리 융숭하고 빚을 내서라도 잔치를 하는 우리들의 관습으로 볼 때 크게 흠잡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언론들은 ASEM회의 기간중 시행된 승용차 홀·짝수제에 90% 이상의 시민들이 동참해 성숙한 시민의식을 보여 주었다고 논평했다.

이제 잔치는 끝나고 손님들도 떠났으니 홀·짝수제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기분이 든다.

언론의 보도와는 달리 나흘간의 홀·짝수제 기간중 계도기간에는 많은 차들이 이를 지키지 않았다.

벌금 5만원을 매기는 이틀간의 강제기간에도 새벽길에는 위반차량이 너무도 많이 보였다.

신문에는 어떤 국회의원도 위반했다는 사진이 나왔다.

홀·짝수제 나흘 중 이틀을 버스와 택시를 타고 다니면서 옆에 지나는 위반차량들을 볼 때 어쩐지 욕하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다.

동부간선도로를 타고 상계동을 벗어나 수락산 입구 의정부시를 들어설 때 "홀·짝수제는 서울로 진입하는 경기도 차량에도 적용됩니다"라는 입간판을 보고는 어쩌면 홀·짝수제를 무시하고 다니는 사람들의 자유정신이 가상하기까지 했다.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뉴욕에 근무하면서 유엔총회가 열릴 때 수많은 국가원수들이 와도 홀·짝수제를 시행하는 것을 본적이 없다.

작년에 뉴질랜드의 오클랜드에서 열렸던 APEC총회에 참가했는데 그곳에서도 많은 나라의 국가원수들이 머무르는 호텔과 회의장의 일정구역만 통행을 제한할 뿐,시민은 자유스럽게 통행하며 생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중국의 장쩌민 주석이 연설하는 만찬장 입구에는 천안문 사태와 인권탄압을 비난하는 피켓을 든 화교들의 데모도 있었지만,경찰들의 잘 훈련된 통제 아래 모든 것이 자연스럽고 자유스럽게 진행됐다.

ASEM회의가 열리는 서울 강남에 있는 무역센터와 26명의 국가원수 및 대표들이 머무는 호텔과 주요 길목만 통제해도 될텐데 저 멀리 북쪽 수락산 자락의 상계동까지, 그것도 경기도 차까지 통행을 제한했으니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쳤다는 감이 들었다.

만약 뉴욕에서 유엔총회가 열릴 때 많은 국가원수들이 온다고 뉴욕시 전역에 홀·짝수제를 실시했다면 뉴욕시민이 어떤 반응을 보였겠는가를 생각해 보았다.

미국에서는 그런 계획을 세우는 관리도 없겠지만,만약 세웠다고 하면 뉴욕시민들은 자동차 경적을 울리면서 정부의 통제를 거부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우리는 시민의 뜻도 불편도 생각지 않고 걸핏하면 10부제나 홀·짝수제를 들고 나온다.

10부제는 차량이 10% 늘어날 때까지 일시적 효과밖에 없는 수학적인 착각이다.

강남의 무역센터에서 열리는 회의 때문에 멀리 상계동 지역도 홀·짝수제를 지키게 하는 것은 관료들의 자기편의라는 생각이 든다.

차를 두대 가진 사람은 몰라도,차 한대로 생업을 이어가는 사람들을 생각할 줄 아는 관료의식은 언제 우리에게 자리잡을지….

우리 헌법에는 "국민의 모든 권리와 자유는 질서유지를 위해 필요한 경우에 한해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으며,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있다.

또 도로교통법엔 "교통의 원활한 소통을 확보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때에는 구간을 정해 차마의 통행을 금지하거나 제한할 수 있다"고 명백히 규정하고 있다.

홀·짝수제가 실시되면 사람의 통행이 많아 복잡하니 ''주민등록증 홀·짝수제''를 실시하자는 어떤 신문의 만화가 있었다.

웃고 넘기기에는 관료들은 너무나 전근대적이고 시민은 너무나 순치(馴致)돼 있다는 감을 떨칠 수 없다.

그리고 찾아온 손님에게도 과공(過恭)은 비례(非禮)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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