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늦가을의 고즈넉한 분위기는 지는 해 너머로 문학과 예술에 대한 감상에 젖어들기에 충분하다.

어렸을 적 외웠던 시 한조각 읊으며 그림같은 고향 전원풍경을 가로질러 문인 예술인들이 느꼈던 감흥에 빠져 볼만도 하다.

한국관광공사가 11월 가볼만한 곳으로 선정한 "한국의 문학.예술의 고향을 찾아 떠나는 문학.예술기행 5곳"을 소개한다.


<> 조지훈 이문열 생가 =경북 영양은 문향(文鄕)의 고장.

일월면 주곡리 주실마을은 시인 조지훈의 고향이다.

석보면에는 소설가 이문열의 생가가, 영양읍 감천리에는 시인 오일도의 생가가 있다.

주실마을 입구에는 조지훈의 문하생들이 세운 시비가 있고 비에는 "빛을 찾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시가 새겨져 있다.

조지훈 선생이 태어난 호은종택이라는 집은 조선 인조때 지은 것으로 고고한 선비정신이 살아 숨쉰다.

이문열의 고향인 두들마을에는 석계고택 석천서당 등이 생가주변을 에워싸고 있어 이문열이 왜 문학에 심취하고 많은 대작들을 쓸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기회가 된다.

영양읍 남쪽으로 있는 감천마을에는 시인 오일도의 생가가 위치해 있는데 그는 24세때 등단해 시문학지 "시원"을 창간한 인물이다.

생가 앞 하천 절벽에는 측백수림이 군락을 이루며 자생하고 있다.


<> 한용운 생가 =토굴새우젓으로 소문난 충남 홍성군 광천읍에서 천수만 방면으로 가다보면 결성면이 나온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굽은 도로를 따라가면 만해 한용운 생가에 닿는다.

싸릿대 울타리로 복원된 생가는 초가지붕에 방 2칸 부엌 1칸의 일자형 구조.

댓돌이며 툇마루가 한없이 정겹다.

생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패와 영정을 모신 만해사라는 사당이 있다.

한용운 선생은 1879년 성곡리에서 태어나 9세에 문리를 통달, 신동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만해 동상은 홍성읍에서 보령으로 내려가는 21번 국도변에 있는데 생가 방문후 들러볼만하다.


<> 청마문학관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물같이 까딱 않는데/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청마 유치환 시인의 "그리움"의 한 구절이다.

그는 한국 시문학에 큰 획을 그은 시인이다.

그의 시에는 울분 탄식 저항 질타 등이 강렬하게 담겨 있는데 그가 태어나고 자란 통영의 문화를 이해하지 않고선 쉽게 접근하기 어렵다.

유치환 선생 생가는 원래 통영 태평동에 위치해 있다.

그러나 이 지역이 도심지역이어서 통영시는 정량동 언덕으로 이전하고 올해 그 아래 청마문학관을 개관, 통영의 관광명소로 꾸몄다.

유치환 선생의 출생이 거제도 둔덕면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이는 "거제도 둔덕골"이라는 그의 시에서 고향이라는 문구가 나오기 때문인듯 하다.


<> 이중섭 거주지 =화가 이중섭은 1916년 평남 평원 송천리에서 태어났다.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나 청년기에는 도쿄에서 유학을 하기도 했다.

6.25 전쟁은 그에게 고난과 빈곤한 삶의 시작이었다.

동란기에 그는 1년동안 제주 서귀포에서 살았다.

"파란 게와 아이들", "서귀포의 환상", "섶섬이 보이는 풍경" 등은 서귀포의 아름다운 풍경과 넉넉한 인심을 소재로 한 목가적인 작품이다.

이중섭은 서귀포에서 가족을 잃고 부산으로 떠난후 정신이상 증세와 영양실조 등으로 1956년 41세로 생을 마감한다.

서귀포시는 그의 작품세계를 기리기 위해 서귀포 정방동 거주지를 당시 모습으로 복원하고 정방동 매일시장 입구부터 솔동산까지 3백60m를 "이중섭 거리"로 지정했다.

그가 가족 4명과 기거했던 방은 1.3평 정도의 협소한 공간으로 당시 그의 인생이 얼마나 초라했는지를 말해준다.


<> 신재효 고택 =판소리를 집대성해 국문학사에 뛰어난 족적을 남긴 동리 신재효 선생.

그의 고택은 전북 고창읍 읍내리에 있다.

그의 고택은 1850년께 지어졌으며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로 지어진 사랑채와 오동나무 우물 등이 현재도 남아 있다.

1979년에 보수, 정화됐다.

동리 선생은 말년까지 이 집에 살면서 노래청을 두고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고 토끼타령 박타령 심청가 적벽가 춘향가 가루지기타령 등 6마당의 판소리 사설을 편술했다.

고택 뒤에는 동리국악당을 개관, 고창군에서 운영하고 있고 고택을 한바퀴 돌아보는 동안 국악당에서 틀어놓은 판소리가 내내 귓전을 울린다.

생가 뜨락 한쪽, 우물 뒤쪽 담벼락에는 그의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이성구 기자 sk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