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기업 구조조정계획에 따른 은행권의 부실기업판정이 다가오며 벌써부터 실망의 목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다.

퇴출보다는 회생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그나마 부실로 판정될 기업들은 주목 대상이었던 대기업이 아니라 송사리 몇개에 불과할 것이라는 것이 우려의 근거이다.

다급해진 금융감독원이 좀더 엄격해진 기준을 제시하고,잘못되면 책임을 묻겠다며 은행들을 다그치고 있지만,이 정도 엄포로 될 일이었으면 이미 오래 전에 문제가 해결됐을 것이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부실처리방식은 시작할 때부터 결과가 예상됐을 정도로 이런 저런 무리수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채권은행의 자율적 결정에 맡긴다는 것과,시간표를 정해 놓고 모든 일을 완료하겠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같은 일을 왜 이렇게 골라서 어렵게 하는가 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여기에다 동아건설과 같은 대표적 부실기업은 퇴출시켜 본 때를 보여야 한다는 훈수꾼들의 기세마저 만만치 않으니,정부나 은행 모두 비상구를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 나라의 은행이 이윤극대화를 추구하는 자유기업이라면 정부의 간섭이 없어도 알아서 부실기업을 가려낼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은행들은 실질적으로 준정부기관이었고 지금도 그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부실판정이 늘수록 은행의 수익성이 악화되고 이는 곧 제 목을 은행 구조조정의 단두대에 올리는 꼴이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일이다.

업종이 다른 기업들을 획일화된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도 어렵지만,더 두려운 것은 선택을 잘못한 경우 이를 사주한 사람보다 손에 피를 묻힌 망나니가 먼저 감옥에 간다는 우리의 현실일 것이다.

은행의 자율적 판단에 의해 부실기업을 가린다는 명제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정부가 떳떳하게 전면에 나서 의사결정의 책임을 떠 안아 주는 것이 정도이자 가장 효과적인 해결책이다.

그런데도 높은 곳에서는 구조조정 잘못하면 책임을 묻겠다는 질책만 내려오니 책임전가의 사다리가 줄줄이 이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신용경색이 악화되고 구조조정이 지연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기업구조조정의 또 다른 함정은 시간표를 짜놓고 모든 것을 끝내겠다는 것이다.

정책 중에는 기한을 정하는 것이 필요한 경우도 있겠지만,구조조정과 같이 기업이나 은행의 체질을 바꾸는 작업은 하루 이틀에 끝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나아가 구조조정의 목표도 부실을 모조리 파헤쳐 없애는 것이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

시장이 원하는 것은 기업들이 앞으로 살아남을 가능성이지,어쭙잖은 잣대로 평가되는 과거의 실적이 아니다.

부채비율이 높을 수 밖에 없었던 우리의 제도적 여건을 이해하지 못하는 외국학자들이 내뱉는 한마디를 복음처럼 모실 이유는 없다.

과거와 달리 개방되고 자율화된 경제환경에서는 부채가 많으면 파산위험이 높다는 교훈을 기업 스스로 깨닫고 대비하게 만드는 게 정부가 할 일이다.

원칙없이 부실기업에 돈을 퍼붓다가 이제 와서 책임을 묻겠다고 하는 상황 자체가 모순이다.

단기간에 뭔가 보여 주려고 무리수를 두면 상처는 안에서 더욱 곪아갈 것이다.

기업부실처리의 세번째 함정은 대기업 몇개를 손 봐서 의지를 보이라는 외부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정말 그렇게 해서 시장이 살아나고 외국자본이 몰려든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정부가 나서서 선별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고,실제로 득보다 실이 크다는 것이 우리가 배운 교훈이다.

큰 고기가 물에 떠다닌다고 준비없이 강으로 뛰어들 수는 없는 것이다.

개혁이 물 건너간다고 안타까워하는 학자들의 속마음은 이해하지만,정책의 수단이 제한된 상황에서 여러 목표를 동시에 주문하는 것은 무리다.

이 참에 재벌개혁까지 하면 좋겠지만 개혁은 한번에 하나씩 끈기 있게 하는 것이 생명이다.

강경식 부총리를 감옥에 집어넣고 외환위기평가가 끝났다고 선언하는 나라인데,현대건설 하나 퇴출시키고 나서 기업 구조조정완료라고 점을 찍지 않을까 걱정된다는 얘기다.

냉정히 돌이켜 보면 기업구조조정을 둘러싼 함정들은 우리 스스로 파 놓은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다.

한발 물러설 때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