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택영 < 경희대 영문학부 교수 roockie@unitel.co.kr >

서랍마다 물건들이 가득 채워져도 돌볼 틈조차 없이 살다가 그저 1년에 한 번쯤 여유가 생긴다.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이람,짐만 되지.

그렇게도 건강하시던 아버지는 어느 날부터인가,한개씩 지워져 가는 기억들을 붙잡으려 애쓰셨다.

앞으로 길어야 반년이라는 믿기지 않는 소리에 효심이 지극했던 남동생은 가슴이 미어져 병원의 간이침대에 길게 누워버렸다.

돈에는 너그럽던 아버지는 그러나 지난 시절의 흔적에 대해서는 애착이 많으셨다.

학창시절의 누렇게 바랜 사진부터 성적표,편지,하루 일과를 빠짐없이 기록한 일지 등을 보물처럼 다루셨다.

우리는 아버지의 흔적들을 빠짐없이 거두어 집안에 들여놓았다.

흐뭇해서 내려다 보시던 아버지는 결국 의사가 말한 시간에 먼길을 떠나셨다.

나는 그 많은 흔적들을 차곡차곡 정리하면서 ''사람이 살아가면서 필요한 물건은 아주 조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후부터는 꼭 필요한 것만 남기려 애를 써 왔다.

서랍 밑에서 아주 오래된 얇은 편지봉투가 손에 집힌다.

졸업축하로 받은 카드,귀국 후 잘 지내느냐고 묻던 편지,내가 아주 힘들어할 때 동료가 보내준 편지,내가 잘 풀릴 때 축하해 주던 선배의 편지,그리고 애틋한 문구가 듬뿍한 제자들의 편지와 카드….

아,그분이 나를 이렇게 위로해 주신 적이 있었구나.이 학생이 이런 카드를 보냈었나? 그래 그분에게 섭섭해 하지 말아야지.그 학생의 입장을 너그럽게 이해하자….까마득히 잃었던 지난 날들이 편지를 들출 때마다 떠오르면서 가슴이 넓어지고 아파 왔다.

내가 없던 텅 빈집에 온 가족이 몰려와 분홍색 커튼이 쳐진 거실을 둘러보며 새집을 축하한다고 한마디씩 적어 놓았던 하얀 종이.

아버지,남동생….

지금은 가고 없는 사람들의 글자가 나를 위로하듯 올려다 본다.

남의 서랍을 훔쳐보듯 나는 내 과거를 훔쳐본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그 편지들을 한 개도 버리지 못하고 다시 집어넣는다.

그리고 아버지가 왜 그 많은 흔적들을 마지막까지 지니고 다니셨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내가 그렇게 많은 사랑을 받았었단 말인가.

그 동안 없앴던 카드들까지 덤으로 얹어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