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택영 < 경희대 영문학부 교수 roockie@unitel.co.kr >

김이 보얗게 오르는 샘에서 세수를 하고 급한 걸음으로 방문고리를 잡으면 쩔꺽 문고리가 내 작은 손을 마주 잡는다.

문고리가 달라붙으면 여름이 좋다고 생각했고,더위와 모기가 힘을 합쳐 달라붙으면 겨울이 더 좋다고 마음을 바꾸곤 했다.

그러나 ''정말 좋은 것은 스치듯이 짧은 것''이라며 봄과 가을은 오는 듯이 가버린다.

노란 낙엽만큼 노란 얼굴로 캠퍼스를 걸으면 사람들은 간밤에 또 내게 무슨 일이 있었구나 금방 알아챈다.

어른의 손바닥만한 납작한 양주 한 병을 홀짝홀짝 다 비우고 그래도 정신이 말짱해서 버본 스트레이트를 단숨에 들이키고 자리에서 일어서면 아직도 걸을 만했다.

그리고 집에 와서 깜박 잠이 들었다가 눈을 뜬다.

속이 흐느적거리기 시작하면 아침까지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맹세를 수없이 되풀이한다.

그리고 다음날 오후 교정을 걸으면 사람들은 내 눈에서 다시 살아난 감격을 읽나 보았다.

한해에 한번씩, 그런 의식을 몇번이나 치른 뒤 나는 고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이상하게 그게 모두 가을이었다.

잡아당기는 문고리도 없고 끈적거리는 무더위도 지난,아름다운 가을날 저녁에 나는 왜 사는지를 몰라서 술병을 홀짝거렸다.

그러면 그날 밤에 술은 정직하게 내게 대답을 해주었고 또 한해를 무사히 넘기곤 했다.

황홀하게 아름다운 가을이 왜 나를 괴롭혔던가.

플라톤은 ''사랑은 없는 것에 대한 갈망''이라고 말했다.

헐벗고 거칠고 가난한 여신은 아프로디테의 잔칫날,술에 취해 곯아떨어진 풍요의 신을 보고 그 옆에 누워 아이를 잉태했다.

그렇게 태어났기에 에로스는 풍요이면서 결핍이고,있으면서도 보이지 않는 유령이고,삶이면서 죽음이다.

모든 것을 다 줄 것 같지만 하나도 주지 않는다.

마치 가을처럼….

가을은 에로스다.

쨍그렁 부딪칠 것 같은 파란 하늘 끝에 붉은 감이 한개 걸려 있다.

그 감이 내게 왜 사느냐고 묻기 전에 나는 얼른 얼굴을 돌린다.

다시는 죽고 싶다는 생각 안하고 열심히 살겠다던 술 앞에서의 맹세를 떠올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