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에 의하면 경복궁 경희궁 인사동 등을 포함하는 광화문 일대를 ''문화공원 지대''로 가꿀 것이라고 한다.

반가운 일이다.

산업화의 집념으로부터 벗어남에 따라 경제가치 이외의 것에도 주의를 기울일 여유가 생겨 가는 것으로 생각된다.

도시의 경우에도 이제 콘크리트 상자의 시대가 끝나고,건축과 도시의 문화적 의미가 재발견되는 날이 오는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간의 증후들로 보아 참으로 좋은 문화적 도시가 이뤄지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얼마 전 불국사를 방문할 기회를 가졌다.

불국사는 단순한 구조물로 볼 때,석조부분들이 보다 정교한것 말고는 다른 절이나 다를 바 없는 절 집에 불과하다.

그렇다는 것은 지금의 상태에서 신라 불교와 신라의 삶의 느낌을 전혀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불상이 있고 불상 앞에 제단이 있긴 하지만,불국사가 불교의 도량으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과 관계되는 일일 것이다.

관광객이라 하여 불국사에서 구경거리만 찾는 것은 아닐 것이다.

관광을 나서는 마음 밑에 있는 것은 어떤 이상적인 삶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적어도 어떤 삶의 모습을 새롭게 느껴 보자는 것일 것이다.

보수를 하고 단청을 하기는 했지만,풀도 나무도 없이 모래만 어수선한 뜨락,흙먼지 덮인 주랑,그 주랑의 앙상한 기둥….이러한 것에서 신라시대의 삶을 상상해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이러한 것은 다른 오래된 관광 명소 또는 새로 만들어 놓은 놀이터나 문화시설의 경우에도 비슷하다.

이것은 우리의 미학과 생활철학에 깊이 관계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어떤 것이 미적 대상이 되는 것은,그 사물 자체에 못지않게 장소의 분위기로 인한 것이다.

분위기가 사라지면 물건은 죽은 물건이 된다.

분위기는 보는 사람의 대상에 대한 관계 속에서 생겨난다.

그러나 그것이 순전히 사람의 마음 속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물건을 볼 때 맨 먼저 눈에 띄는 건 물건 자체이고 물건에 드러나는 섬세한 결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물건이 놓여있는 주변공간이다.

물건은 적정한 공간에 놓여 있음으로써 비로소 빛이 나는 것이다.

물건을 에워싸는 환경은 시간일 수도 있다.

옛 물건들의 의미는 옛날의 시대를 생각나게 한다는 데에 있다.

물론 옛날이라는 것은 보는 사람의 눈 앞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물건을 에워싸고 있는 것들이 어울려 예스러운 환경을 이뤄야 한다.

오늘날은 물건의 결도, 환경의 전체적인 구성도 없는 시대다.

그것은 전근대의 얘기다.

지금은 변화와 속도와 순간의 시대다.

오늘의 미술을 대표하는 건 설치와 영상과 이벤트다.

도시의 아름다움에 있어서도 페인트와 광고와 설치가 그 미적 효과의 전부로 생각된다.

나는 불국사의 청운 백운의 석교 위로 회랑을 세우기 전,약간은 황폐한 그전의 불국사에서 신라를 더 느낄 수 있었다.

석교 위의 트인 공간으로부터 멀리 아래 쪽을 내다보면,경주의 시가지로부터 걸어 올라오던 옛 선남선녀를 상상할 수 있었고, 석교의 얼룩진 무늬에서 역사의 시간을 느낄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좋아진 마당에,아마 이러한 감상은 극히 소수의 감상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을 왜 복원하지 않는지….이러한 것을 생각하는 것이 전적으로 틀린 일은 아닐 것이다.

오늘날은 미술뿐만 아니라 무슨 일에서나 없앴다 세우고,세웠다 없애는 설치의 시대다.

그러나 사람과 땅의 관계만은 그렇게 일시적으로 간단하게 생기고 없어지는 관계가 아닐 것이다.

사람이 사는 공간의 지속성이 있어서 비로소 설치도 의미를 갖는 것일 게다.

사람이 공간을 다스리는 것은 공간의 넓은 전체를 조화롭게 하는 것이고,거기에 시간의 깊이를 부여하는 일이다.

이것은 물론 한 사회의 삶의 무게로부터 나온다.

그것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기보다 당대의 삶의 방식을 일관하는 무의식을 반영하는 것이다.

광화문 일대를 문화공원으로 조성하는 계획이 분식과 화장술,디즈닐랜드적인 발상을 위주로 하는 것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