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출외압사건으로 시끄러운 한빛은행의 한 고위 간부가 얼마전 워싱턴을 방문했다.

그는 몇몇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우리나라에서 국제경쟁력이 가장 강한 부문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갑작스런 질문에 워싱턴특파원들이 멀뚱멀뚱한 눈으로 가만히 있자 이 한빛은행의 고위 간부는 "바둑"이라고 설명했다.

이창호 조훈현등 세계바둑계를 휩쓸고 있는 사람들을 떠올리면 그럴듯한 대답이었다.

모두들 수긍하고 이야기가 끝난 줄 알았는데 이 은행간부는 "그런데 왠지 아느냐"고 다시 물었다.

기자들의 궁금증이 커지자 "바둑에는 소관부처가 없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기실 우리나라에서 기업이나 은행을 경영하는 사람 치고 소관부처에 진저리를 내지 않는 사람이 과연 몇명이나 될까.

김대중 정부가 ''기업하기 좋은 나라''라는 슬로건과 ''규체철폐''라는 용어를 국정의 목표로 내걸고 등장한지 벌써 2년반이 지났다.

하지만 소관부처의 규제사슬이 줄어들었다고 믿는 기업과 시민은 극히 드물다.

마치 조지 오웰의 ''1984년''에 나오는 ''대형(Big Brother)''처럼 소관부처의 규제사슬은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묶어놓고 있다.

바둑에는 소관부처가 없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문화관광부가 이를 관장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우연의 일치일까.

이 한빛은행 간부의 ''소관부처론''의 잔상(殘像)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한빛은행 대출외압사건이 불거졌다.

외압여부는 검찰의 수사결과를 더 지켜봐야 하지만 만약 박지원 장관이 개입했다면 이것은 소관 부처 밖으로부터의 영향력행사다.

이는 우리은행들이 소관부처뿐 아니라 소관부처 밖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 들어 워싱턴 사람들은 한국경제에 대한 어두운 소리만 듣고 있다.

유가폭등,국내여력을 도외시한 남북의 과다한 제스처,주가폭락,포드의 대우자동차 인수포기 등은 한국경제를 제2의 위기로 몰아넣고 있는 요인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특히 이같은 악재속출이 지난달 23일 IMF가 한국을 IMF프로그램에서 ''조기졸업''시킨 것과 때를 맞춘 것이어서 이곳 사람들의 우려는 남다르다.

한국의 금융구조개혁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 이곳 IMF,세계은행,그리고 그 산하기관 사람들은 이번 한빛은행 외압대출사건을 비중있게 지켜보고 있다.

리스크평가에 의한 대출이야말로 은행책임경영의 본질이고 금융개혁의 최종목표라고 보는 이곳 사람들로서는 ''외압대출''이라는 용어 자체에 적지않은 거부감과 실망을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금융구조조정에 매달려온 한국이지만, 은행자율로 대출여부를 심사할 수 없다면 그런 금융개혁은 하나마나한 것이라는 냉소가 짙게 깔려있는 것이다.

우리 금융권에 인사청탁 대출외압등 관치금융의 그림자가 사라졌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

얼마전 있었던 은행권 노사분규 당시 협상파트너가 ''행장-행원''이 아니라 ''정부-행원''이었던 장면은 관치금융과 ''소관부처 증후군''이 우리사회에 얼마나 뿌리깊게 남아 있는가를 보여준 좋은 본보기였다.

보다못해 한국말을 잘하는 한 일본기자가 "한국에는 까마귀가 없다.
잊어먹기 잘하는 한국인들이 다 잡아먹었기 때문이다"는 농담을 들먹였다.

97년 IMF에 구조금융을 신청한지 3년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 또다른 위기감에 젖어있는 한국경제에 대한 일본기자다운 촌평이다.

외환위기뿐 아니라 더 길게 보아 "한국인들은 6·25도 잊어먹고, 양곤테러,KAL기 폭파 등도 잊어버린 지 오래"라는 게 이 일본기자의 덧붙임이다.

이런 정도의 망각증세 속에선 ''규제철폐나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들먹이는 것은 차라리 진부하거나 사치스러운 허욕(虛慾)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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