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이 되면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미국 볼티모어에서 대학원에 다닐 때의 일이다.

미국의 추석은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이라 하여 1년 중에서 가족과 함께 하는 가장 큰 명절이다.

이때 만큼은 고속도로가 꽉 막히는 것이 한국의 도로사정과 다르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부모님이 사는 고향집으로 찾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혼자 독학하면서 학교에 다니고 있던 나에게 미국 명절은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추수감사절이 하루 앞으로 다가오자 학교는 텅 비었다.

그날도 늦게까지 작업실에 있다가 새벽이 돼 집으로 돌아왔고 늦잠을 잤다.

다음날 깨어보니 어느새 오후였다.

냉장고를 열었지만 먹을 것이 없었다.

가게들도 거의 문을 닫아서 음식을 사러 갈 곳도 없었다.

모두들 가족과 어울리는데 나 혼자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친구가 자기 엄마집으로 초대했지만 거절했던 것이 그제서야 후회됐다.

미국 추수감사절의 기원은 162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종교탄압을 피해서 메이 플라워호를 타고 버지니아에 상륙한 1백2명의 필그림은 그들의 정착을 도와준 인디언과 함께 첫 수확물로 감사절을 지냈다.

그런 역사적 배경을 두고 볼 때 추수감사절은 미국인들에게 각별한 명절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날 ''세븐-일레븐'' 핫도그로 배를 채울 생각을 하니 서러운 마음이 절로 들었다.

처량하게 앉아있던 나는 전화번호부 책을 꺼내 근처 식당에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전화벨만 울릴 뿐 받는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혹시나 싶어 언젠가 한번 간 적이 있는 중국 식당에 전화를 걸었다.

서너번쯤 벨이 울리더니 누군가 받았다.

화교인 주인여자였다.

주인여자는 뭔가 가지러 잠깐 나왔을 뿐 식당문을 연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저 사실은 음식을 사 놓은게 없어서 그래요. 배가 고파요"

주인 여자는 잠시 망설이더니 뭘 먹겠느냐고 물었다.

"아무 거나요. 뭐든지 괜찮아요"

"그럼 빨리 오세요"

잠시 후 낡아빠진 서머세트를 몰고 골목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4차선 도로가 텅 비어 있지 않은가.

아직 환한 대낮이었다.

그 많던 차들과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그 시간에 거리를 지나가고 있는 사람은 오로지 나 뿐이었다.

정지된 세상 속에서 혼자 무중력 상태로 부유하고 있는 허전함이 파고 들었다.

그때 무슨 음식을 먹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어느 순간 가게 문 안으로 들어온 늙은 거지가 생각난다.

주인 여자는 애처로운 마음이 들었던지 주방으로 가서 음식물을 챙겨다가 거지에게 주었다.

그날 중국식당의 손님은 나와 그 늙은 거지 뿐이었다.

추석 하면 또 한 가지 떠오르는 아픈 단상이 있다.

볼티모어 근처에는 큰 항구가 있어서 외항선이 들락거렸다.

나는 한때 한국인 선원을 시내까지 픽업하거나 배에서 필요한 식용품 따위를 나르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하루는 선원들을 데리고 슈퍼마켓에 가야했다.

뒷좌석에 올라탄 선원 한명이 비닐봉지에 싼 물컹한 것을 건네주었다.

그 안에는 검은 콩을 박은 밀가루 전병이 들어 있었다.

"오늘이 한국 추석이잖아요. 몇달씩 항해를 하다보니 배안에 쌀가루나 찹쌀가루가 있을 턱이 없죠. 흉내만 냈어요. 밀가루 떡이에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왈칵 쏟아졌다.

10년을 미국에서 사는 동안 나는 한국 명절을 거의 잊고 있었다.

한국의 추석과 미국의 추석은 날짜는 물론이요 어감부터 다르다.

가족과 함께 하지 못하는 명절은 속빈 강정처럼 쓸쓸함만 더한다.

올해도 추석이 왔다.

한 해의 곡식을 추수하고 지친 마음을 추스르는 시간이다.

가을의 문턱에서 보름달은 휘영청 밝기만 하다.

추석이 아름다운 것은 가족 친지와 함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토록 소중한 명절에 가족에 대한 사랑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usedream@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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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약력 =

△미국 메릴랜드예술대
△장편소설 ''모짜르트가 살아있다면'' ''우리는 호텔 캘리포니아로 간다'' ''자전거를 타는 여자'' 등
△연세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