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택영 < 경희대 영문학부 교수 roockie@unitel.co.kr >

평생 끈질기게 달라붙을 것 같던 열기가 어느 날 갑자기 물러서며 서늘한 바람이 스칠 때 이상스레 마음 한구석이 텅 비면서 바람이 마음 속으로 쏙 들어온다.

속이 시원해야 할텐데 웬 그리움일까.

더위와 싸우느라 단단히 무장을 했던 몸이 물기 빠진 채소처럼 줄어들며 허전해진다.

두리번거리고 보니 이제 적이 마음 밖에 있는 게 아니라 마음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

나무도 줄어들고 풀도 줄어든다.

밖의 적보다 안의 적이 더 무서운지 만물이 고개를 숙이고 그동안 만든 열매를 한 웅큼씩 내놓으며 어디론가 뒷걸음친다.

바람 든 마음을 달래느라 사람들은 호박넝쿨도 거두고 다람쥐와 경쟁을 하면서 밤나무에 매달려 밤을 털기도 한다.

그리고 문득 바라본다.

하늘이 저렇게 높아졌으니 날 너무 나무라지 말라는 듯이 한껏 매달린 주홍빛 감은 그냥 바라만 봐도 마음이 따뜻해진다.

한가위의 둥근 보름달이라면 나는 송편을 빚으며 바라보던 기억보다 허겁지겁 어두운 밤길을 걷던 기억으로 더 남아있다.

얇은 송판을 엇대어 지은 작은 집 안에는 내 또래 아이들이 버글거리고 그것도 모자라 좁은 골목길까지 줄지어 서 있다.

여느 때 같으면 텅 빈 골목이 오늘은 해가 저물도록 북적거린다.

나는 초조해진 마음으로 연신 머리통을 매만지며 문을 나오는 친구들을 바라본다.

사내애의 밤송이처럼 텁수룩했던 머리는 어느 순간에 파릇하게 반짝거리고 여자애는 울상을 짓는다.

분명히 옆에서 엄마가 더 짧게 짤라달라고 이발사 아저씨를 보챘을 거다.

미국에서 공부하던 시절,추수감사절이 되면 남들은 좋아서 고향으로 가는데 난 보통 때보다 더 추워져 도서관에도 못 가고 방에 앉아 이발소 목욕탕 방앗간 생각을 했다.

혼자 사는 유학생들은 남들이 노는 휴가가 그리 달갑지만은 않았다.

고향에서 보내준 달력에서 방앗간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전화벨이 따르릉 울린다.

칠면조 고기가 엄청나게 맛있어서가 아니라 내가 이 도시에 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부름이어서 마음이 가득 차 오른다.

고속도로가 가득 차고 상위에 음식이 가득 차는 추석 때면 북적대는 가족들 틈새에서 나는 어디선가 멀리서 전화 벨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가족끼리 모여 차례를 지내는 우리네 풍속도 중요하지만,혼자 사는 낯선 사람들을 그저 한 사람이라도 불러 밥상을 함께 하는 풍습도 아름다울 것이라고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