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시 저녁뉴스는 남해 서부를 강타하고 있는 태풍 속보로 채워지고 있다.

요즘 제각각 무슨 일인가로 바쁘던 우리 모녀는 모처럼 저녁뉴스 앞에 앉았다.

"어머나 저것 좀 봐요"

"그러게…"

어머니도 어지간히 놀라시는 눈치다.

태풍에 날아간 지붕과 대문짝들, 난파된 선박들, 무너진 방조제.

그러나 끝도 없이 이어지는 기상속보에 지루해지신 어머니는 "아유 알았다 알았어. 이제 돌리든지 끄든지 해라" 하신다.

어머니에게 태풍이란 그런 것이다.

소처럼 순한 농민들을 시름에 빠뜨리고 졸지에 숱한 이재민을 만드는 천재지변이라 여길 뿐, 도무지 남의 일만 같은 것이다.

어머니는 방에 들어가시고 혼자 TV앞에 앉은 나는 쓰러진 볏단을 일으켜 세우는 늙은 농부와, 떨어져 내린 배를 허탈하게 바라보는 과수원지기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저것은 내가 지난해 내려가 있던 시골마을 모습이다.

빗속에 우비를 입고 나가 기진하도록 볏단을 세우는 시골 할머니와 망가진 고추밭 앞에서 한숨 쉬던 할아버지 모습이다.

그 늙은 농부들이 사는 남도의 마을에서 나는 전에 보도 듣도 못한 태풍을 만났다.

지붕의 기왓장이 날아가 마당에 둔탁한 소리와 함께 으깨지고 50년 된 감나무가지가 우지끈 부러져 나가는 것을 보고 겁이 난 나는 방안에 갇혀 노트북 자판만 헛되이 쳐대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쩍 하고 억센 나뭇가지 하나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당에 작약이며 족두리꽃 나리꽃 같은 초본들은 애저녁에 모로 쓰러져 쑥대밭이 돼 있었다.

그리곤 이깟 시골 하숙방이야 단번에 쓸어버릴 수 있다는 당당한 기세로 비가 다시 쏟아졌다.

그런 야성적이고도 파괴적인 힘을 나는 전에 만나본 일이 없다.

그날 오후 나는 그 집 늙은 농부와, 그의 젊은 며느리와, 그의 아이들과 안방에 모여 앉아 시시각각 전해지는 태풍속보를 들었다.

한 발짝만 마루로 내딛어도 매질 같은 빗발을 피할 수 없던 그 오후, 미칠 듯 창호지문을 흔드는 태풍 이 편에서 우리는 ''걱정마, 같이 있으니까 괜찮아'' 하는 듯 안도의 정까지 느끼며 함께 늦은 점심을 들었을 것이다.

아니면 어떻게 알았을까.

쌀은 어떻게 생기는지, 벼는 언제 거두는지, 나락이 뭔지 도통 알리 없던 서울내기 나는 그때 제법 시골사람이 다 돼 그 집 식구들이 부쳐먹는 몇 마지기 논이며 밭이며, 거기서 나는 어린 작물들 걱정을 하며 어서어서 저 불량배 같은 태풍이 물러가 주기만을 진정으로 바랐을 것이다.

나는 아직 TV앞에 앉아 있다.

태풍은 밤새 세상 농부들과 어민들을 뜬눈으로 지새우게 하고 다음날 아침이면 뭐 별 거 아니었다는 듯 태평하게 물러날 것이다.

꼬리에 꼬리를 물던 올 여름 더위도 태풍처럼 소멸될 것이다.

그리곤 스미듯 가을이 당도해 있을 것이다.

어느 날 국도변을 달리던 나는 부러진 나무들과 스산하게 흩어진 나뭇잎들을 바라보며 지난해 내가 지낸 남도의 마을을 떠올릴 것이다.

만약 그곳을 몰랐다면….

몰랐다면 여전히 TV로 보고들은 태풍을 생각하며 심드렁히 지나쳤을 것이다.

으응, 태풍 힘이 세긴 세구나.

그러니 만나지 않으면, 겪지 않으면, 몰랐다면, 내 일 같지 않으면 이 세상 무엇 하나가 절실할까.

치통도 사람도 부부도 자식도.

친구들은 아직 독신인 내게 충고한다.

"결혼 안 해보고는 몰라. 자식도 자기 배 아파 나아보지 않고는 몰라. 다 아는 것 같지? 그게 그렇지가 않아"

나는 이즘에서야 그 말들이 절실하다.

TV로 본 태풍처럼 뭐 다 아는 것 같았겠지만, 생각해 보면 사랑이니 부부니 자식이니 아직 개코도 모른다.

그러니 만나고 겪고 알고 싶다.

그리고 무어라 말하고 싶다.

겪은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말을.

''아아 굉장했어'' 아니면 ''겪고 보니 알겠어'' 아니면 ''전보다 훨씬 많이 보여'' 그 힘으로 새로 소설을 쓰고 싶다.

그러기 전 우선 시골 마을에 전화 한 통 넣어야겠다.

그리고 여쭤야겠다.

"할머니 비 많이 왔죠? 볏단은 어때요?…고추들은요?"

hannak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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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약력 =

△ 이화여대 정치학과 졸업
△ 장편 ''베두인 찻집''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