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은 30일 "사임한다고 발표해"라는 말만 남기고 여의도 현대증권 사옥을 떠났다.

그의 거취문제를 둘러싸고 최근 몇달간 뜨거운 논란이 벌어졌던 점을 감안하면 너무나 간단하다.

자신을 둘러싼 세간의 소문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AIG와의 이면계약설 등 잡음이 나오자 퇴진을 조기발표했다''는 얘기만 역시 소문으로 나돌았다.

이 회장은 IMF체제가 낳은 풍운아다.

IMF체제 ''덕''에 명성을 얻었고 IMF가 강요한 기업구조조정의 와중에서 순식간에 그 명성을 잃었다.

이 회장은 한때 주식전도사로 불렸다.

IMF체제라는 암담한 환경에서 그는 희망을 이야기했다.

''바이코리아''의 깃발을 앞세워 주식시장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기업들은 싼 값으로 자금을 끌어들여 빚을 갚아나갔다.

경제는 이렇게 되살아났다.

여의도에는 ''이익치 주가''라는 말이 나돌았고 투자자들 사이에는 ''이익치 신드롬''이 퍼졌다.

그는 한국자본시장의 상징적인 인물로 떠올랐다.

동시에 IMF체제를 극복하는 데 공헌한 1등공신으로 부상했다.

그는 그러나 화려한 영광만큼 큰 상처도 입었다.

현대전자 주가조작사건으로 법정에 서는 불명예를 당했다.

현대투신 부실문제도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현대그룹의 내분에도 원하든 원치않든 그는 한가운데에 있어야 했다.

이 와중에서 가신(家臣)이라는 봉건시대의 직함도 따라붙었다.

이익치 회장을 따르는 현대증권맨들은 그의 퇴진이 실패한 경영 때문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드러내놓고 말할 수는 없지만 다른 이유에서 물러나는 것이라는 얘기다.

실제로 이 회장은 현대증권을 국내 1위의 증권사로 키우는 능력을 발휘했다.

퇴진 직전에는 외자유치를 이뤄냈다.

또 증시가 다시 살아나는 데 그의 역할이 참으로 컸다는 사실에 이의를 다는 사람은 별로 없다.

하지만 ''이익치 주가''는 구조적으로 붕괴될 수밖에 없었다고 평가절하하는 이도 적지 않다.

조주현 기자 fore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