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년반 연재를 끝내며 ]

지난 50년 동안 나는 나름대로의 문제의식을 갖고 살았다.

이 문제의식은 곧 내 생의 목표이기도 했다.

이 민족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을 첫 과제로 삼았다.

이를 위해 특히 50∼60년대 무던히 애썼다.

1959년 3개년 경제계획,1961년 5ㆍ16직전 5개년 발전계획 완성에도 참가했다.

이 과정에서 선배 경제인들의 경험을 집결,''수출주도 개발발전전략''을 꾸미는데 앞장섰다.

이 발전전략은 70년대 ''한강의 기적''으로 이어졌고 오늘날 남북 경제 실력의 큰 격차를 가져오기도 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이 나라의 첫 싱크탱크인 ''경제ㆍ기술조사센터''(63년 1월18일)를 출범시켰다.

이는 ''한국경제연구원''으로 발전했다.

곧이어 ''한국수출산업촉진특별위원회''를 발족(63년 3월), 서울 구로동에 ''수출산업공단''을 설립했다.

필자의 머리를 떠나지 않는 하나의 물음이 있다.

왜 우리 조상들은 근대화에 실패했는가.

이 해답에 나는 지금도 골몰한다.

우선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우리 조상들은 세계흐름에 어두웠다는 사실(史實)이다.

이런 역사적 과오는 되풀이돼서는 안된다.

나는 전경련에 몸을 담자 해외정보를 흡수할 기구와 제도 마련에 열을 냈다.

19세기까지 우리나라 해외의 창은 단 하나,즉 중국뿐이었다.

참 안타까운 일이었다.

개인이나 민족이나 비교할 수 있는 정보가 있어야 창의가 싹트는 법이다.

이런 생각으로 나는 미국 일본 유럽 동남아등과 20여개의 협력기구를 만들었다.

내 머리 밑바닥에는 ''다원론적 사고''가 있다.

이는 근대화의 기본틀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시각을 미국 유학에서 뼈저리게 느꼈다.

내가 전경련과 인연을 맺은 것도 이런 사고와 연결된다.

전경련에 들어오기 바로 전에 ''내각기획조정관''(60년 12월∼61년 4월)으로 국가기획업무도 직접 해봤다.

관료조직이 성미에 맞지 않아 반 년도 못 채우고 그만뒀다.

내 생각과 관해 한가지 보탤 것이 있다.

''가진자의 책무-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다.

전경련은 가진 자의 모임이니 응당 사회적 책무를 다해야 한다.

이런 마음으로 77년 기업의료보험제도 마련에 앞장섰다.

경제계가 의료보험제도를 주도한 예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다.

이에 앞서 나는 ''주식공개 촉진제도''를 성사시켰다.

북한과의 체제경쟁에서 앞서기 위해 국민의 편에 선 자본주의, 즉 ''People''s Capitalism''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시대에 따른 문제의식을 갖고 많은 기구와 제도를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꼭 이야기 할 것이 있다.

이 회고록은 호영진,박용정 전 한국경제신문 사장의 권고로 쓰여졌다.

글을 쓰면서 필자는 많은 것을 배웠다.

무엇보다 글쓰는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됐다.

글쓰는 즐거움을 위해 지금도 중학생처럼 연습하고 있다.

쓰다보니 1백16회나 연재됐다.

지면을 할애해 준 한국경제신문 편집진에 감사를 드린다.

前 전경련 상임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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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림=지난 98년 3월 30일 첫회를 시작으로 매주 월요일 연재해 온 "김입삼 회고록-시장경제와 기업가 정신"이 이번 회로 막을 내립니다.

1962년부터 81년까지 한국경제인협회 사무국장과 전국경제인연합회 상임 부회장을 역임한 필자의 회고록은 우리 경제발전사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2년 5개월 동안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의 성원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