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홍상화

이혜정의 말이 다시 들려왔다.

그녀의 한마디 한마디가 진성구의 가슴속을 헤집고 있었다.

"당신이 괴로워한다는 걸 알아요.그러나 지금까지 당한 괴로움보다 수십 배 수백 배 더한 괴로움을 당해야 해요.…그것만이 내가 당한 고통의 일부분이라도 보상받을 수 있는 길이에요.…내가 결혼할지 모른다고 얘기했을 때 당신 표정이 어땠는지 기억해요? 골칫거리가 없어져서 잘됐다는 표정이었어요.그 표정이 밤마다 나를 찾아와 괴롭혔어요.아직도 괴롭히고 있고,앞으로도 영원히 괴롭힐 거예요.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요? 당신 심장이 지금 그렇게 얘기하고 있군요.하지만 그때 당신의 눈길을 속일 수 없어요.상처받은 여자의 눈은 정확해요"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이혜정이 입을 열었다.

"당신이 시카고 영화제에 가기 전날 밤,내가 같이 지내자고 했을 때 당신이 날 어떻게 쳐다봤는지 기억해요? 마치 나를 성욕의 화신이라도 된 여자처럼 보는 시선이었어요"

진성구는 자신의 가슴 위에 놓인 이혜정의 머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머리는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아주 조용히,오래전부터 그곳에 자리잡은 정물처럼 가만히 그의 가슴 위에 놓여 있었다.

그녀의 말만이 다시 그의 가슴속으로 울려퍼졌다.

"내가 아이를 갖지 않기를 원하지요? 아이를 갖는 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여자의 특권이에요.누구의 아이를 갖느냐가 문제지요.
지금이라도 당신 아이를 가질 수 있어요.당신 아이를 가지려면 지금이 좋은 기회지요.지금 난 배란기에 있거든요.지금 나를 가질 자신 있어요?"

진성구는 자신의 가슴 위에 놓인 이혜정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시 이혜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날 가지면,당신은 간통죄를 저지르는 거예요.평생 죄의식을 갖고 살아야 하겠지요.당신이 감당할 수 있을까요? 나는 괜찮아요.
왠지 알아요? 예술가니까요.예술가는 자신의 도덕규범도 창조할 수 있는 사람들이에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다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은 그런 용기도 없는 남자예요….애초부터 당신이라는 남자는 여자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어요"

진성구는 자신도 모르게 헉 하고 신음소리를 내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다시 무거운 침묵이 방안 가득 들어찼다.

그 사이로 달빛이 눈치없이 출렁거렸다.

"어린애처럼 눈물이나 질질 짜지 말고 돌아가세요.난 이렇게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잖아요"

이혜정이 진성구의 가슴에서 떨어져나와 똑바로 누웠다.

그리고 눈을 꼭 감았다.

진성구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침대 밑에 있는 신발을 찾아 신고 병실문 쪽으로 걸어갔다.

진성구는 병실문 손잡이를 잡은 채 되돌아보았다.

이혜정의 꼭 감은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달빛 속에서 이슬처럼 반짝였다.

진성구는 서울대 병원 구내를 걸어가면서 싸늘한 가을 밤바람을 맞이했다.

그리고 그 바람이 그의 가슴 깊숙이 파고들어 고통을 몰아가버리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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