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홍상화

진성구는 바싹 마른 이혜정의 손에서나마 그녀의 모든 것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지적인 차가움과 몸에 배인 고독,세속으로부터의 무관심과 예술가로서의 도도함,무엇보다도 걷잡을 수 없는 여인의 정열…이것이 이혜정이란 여자의 모든 것이었다.

이혜정이 떠났을 때,그는 비로소 그 모든 것들 하나하나가 세상에서 다시 찾기 어려운 희귀한 보석같은 것임을 깨달았다.

그는 이혜정의 손을 자신의 두 손으로 감싸쥐며 독백을 계속했다.

"내가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다고는 제발 말하지 마.나는 혜정을 잊어버리려고 최선을 다했어.혜정을 잊으려고 지금까지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세계를 외롭게 돌아다니며 내 마음을 달랠 자연과 역사를 찾아나섰지.그러나 자연과 역사는 항상 변함없이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나,내가 떠나면 곧바로 나를 잊어버렸어.서글프게도…"

진성구는 잠시 침묵했다가 잠든 이혜정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혜정과 같은 여자를 찾으려고 지금까지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아니야,혜정과 같은 여자가 아니야.혜정의 외모와 비슷한 여자를 말하는 거야.외모만 같다면,혜정만의 특징이야 내 머릿속으로 상상할 수 있으니까,그 여자를 혜정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자신했어.하지만 아! 그것은 틀린 생각이었어.그것은 상상할 수 있는 게 아니었거든.그것은 볼 수 있고,느낄 수 있고,들을 수 있는 것이어야 했어"

진성구는 이혜정의 손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눈물로 젖은 이혜정의 손등을 자신의 뺨에 댔다.

자신의 뺨이 이혜정의 손등을 통해 촉촉히 젖어옴을 느꼈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진성구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고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이혜정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혜정의 손이 펴지면서 자신의 뺨을 어루만지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커튼 사이로 들어온 달빛에 이혜정의 눈동자가 보였다.

이혜정의 얼굴은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는듯 했다.

"깨,깨어 있었어?"

진성구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이혜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혜정이 누운 채 침대 바깥쪽 시트를 들쳤다.

머뭇거리는 진성구에게 시트 안으로 들어오라는 손짓을 하며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진성구가 의자에서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러자 이혜정이 진성구의 상체를 뒤로 밀어 눕혔다.

진성구는 누운 채 두 발로 신발을 벗었다.

진성구가 다리를 뻗자 이혜정이 시트를 덮어주었다.

둘은 아무 말 없이 나란히 누워 있었다.

이혜정이 그녀의 머리를 진성구의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진성구가 오른팔로 이혜정의 어깨를 감쌌다.

그런 상태로 그들은 침묵 속에 누워 있었다.

이혜정의 목소리가 진성구의 가슴을 통해서 귀로 전해졌다.

"아이를 갖지 말라고 했지요? 난 아이를 가져야 해요.

나도 여자니까.

누구의 아이를 가져야 할 것 같아요? 당연히 남편의 아이라야지요.

왜 아이를 갖고 싶은지 아세요?"

이혜정이 물었다.

진성구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당신을 괴롭히기 위해서예요.

왜 괴롭혀야 하냐고요? 그러면 공평해지니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