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군부에서 요청해와

1979년 12ㆍ12사태 이후 이른바 ''신군부''가 국가권력을 장악했다.

사회 전체가 다시 불안과 긴장에 휩싸였다.

특히 경제계 몇몇 재벌총수를 후퇴시키느니,대혁신을 하느니 별별 풍문이 나돌았다.

이즈음 정부로부터 예상외의 요청이 왔다.

이광표(李光杓)문공부 장관은 ''계엄사 기부자산처리위원회''가 환수한 ''현대경제일보,일요신문''을 인수해 달라는 것이다.

이들 신문사를 매각한 돈으로 ''농어촌후계자 육성기금''을 설치할 구상이라고 했다.

이 제안을 받고 필자는 생각했다.

정변이나 변혁이 있을 때마다 도마위에 오르는 것이 경제계다.

언론은 이에 부채질하다시피 했다.

최소한 경제계를 이해하는 언론매체가 있어야겠다.

꼭 ''두둔해 달라''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실정을 알고 공정하게 써달라는 바람이다.

1980년 8월14일 정부로부터 공식인수 요청이 왔다.

"전경련 주도아래 다수 재계인이 인수함으로써 특정인이 지배하는 신문이 되지 않도록 해달라"는 부탁과 함께.

정부가 몇 곳 타진했으나 거절당한 모양이었다.

더구나 ''농어촌후계자 양성기금''을 설치한다고 PR해놓은 마당에 환수한 자산이 팔려야지-.

신군부는 초조했다.

그러니 전경련에 요청할 수밖에.

신문사 운영에 공백을 둘 수 없어 계엄사측과 인수조건을 따지기 전에 운영이양각서를 1980년 9월26일 교환했다.

전경련은 회장단과 중진회원으로 인수위원회를 구성,필자에게 신문사 운영 일체를 위임했다.

공석인 편집국장 물색이 급선무였다.

궁리 끝에 1963년께 전경련에 출입한 호영진 조선일보 기자가 머리에 떠올랐다.

호 기자와 필자와의 인연은 수개월동안 전경련에 출입했다는 것뿐이었다.

다만 호씨는 기사취급에 있어서 필자와의 약속을 꼭 지켜주었다.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해 당시 증권협회에서 일하던 호씨에게 편집국장을 맡아줄 것을 부탁했다.

전경련은 인수조건 50억원,주당 5천원에 시가발행하기로 했다.

이 때 필자는 다음 원칙을 갖고 회원 설득에 나섰다.

①신문사업의 공공성에 비춰 주소유 상한선을 8%로 한다.

②경영과 편집은 자율에 맡긴다.

그리고 당분간 신문사수익은 기대하지 말 것 등이었다.

다음은 사장 문제였다.

당시 정주영 전경련 회장도 필자에게 사장 겸직을 부탁했다.

평소 알고 지낸 이광표 문공부 장관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런데 평소 이 장관 답지않게 말끝을 흐렸다.

후에 안 일이지만 군부실세들이 필자의 사장 취임을 틀었다고 한다.

물론 필자는 실세들을 지금까지도 찾아본 일이 없다.

결국 초대 사장으로 원용석(元容奭)전 경제기획원 장관을 추대했다(1980.11.3).

운영의 도의적 책임은 어디까지나 전경련에 있으므로 윤태엽 전경련 전무와 김정열 상무를 상임감사로,조경식 부장을 이사로 겸직토록 했다.

보수는 받지 않았다.

''現代經濟日報'' 제호 변경은 같은해 11월19일 3회 인수집행위원회에서 ''韓國經濟新聞''과 ''韓國産經''두 안이 제시됐으나 전자로 하기로 했다.

前 전경련 상임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