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정임 < 소설가 ji2958@hitel.net >

온 하루를 보낼 수 있는 미술관을 가진 나라의 국민들은 행복한 사람들이다.

파리의 내로라하는 미술관들인 루브르나 오르세이 퐁피두를 하루씩 날 잡아 돌다 보면,한꺼번에 많은 명작들과 대면하는 데서 오는 극도의 피로와 함께 은근히 질투 섞인 부화가 가슴 밑에서 치솟는다.

우리에게도 하루를 온전히 내줄 수 있는 용량의 미술관이 있는가.

과천의 현대미술관,용산에 건축중인 국립중앙박물관,경주의 국립박물관,용인의 호암미술관 등 많은 곳이 떠오르지만,정작 내용물은 허허롭기 짝이 없다.

그렇게 된 데에는 프랑스와 일본이 한 역할들을 했다.

신비스런 영롱함이 빛나는 고려 불화 ''수월관음도''를 감상하려면 파리의 동양전문 박물관인 기메나 또는 일본에 가야 하니,이 얼마나 답답한 일인가.

나는 삶은 미적이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만 잃지 않는다면 그 삶은 이미 미적이다.

인간의 본능은 선과 악,미와 추 사이에서 끊임없이 길항(拮抗)한다.

둘이되 암수 한몸처럼 하나로 서로를 보완한다.

그늘 속에서 빛을 갈구하듯,빛 한가운데서 어둠을 보듯이.

중요한 것은 삶은 우리가 가고자 하는 바로 그 길 위에 있다는 것이다.

그 길을 잘 보기 위해 취하는 방법 중 하나가 이미 살다간 사람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이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이 그 하나다.

파리나 로마의 미술관들에는 스페인의 산간 할아버지부터 일고여덟살 동양아이까지,심지어 유모차에 실린 두세살배기 아기들까지 우왕좌왕한다.

한국인을 가장 많이 보는 곳도 미술관이다.

특히 모나리자가 있는 큰 방이나 비너스 상 앞에는 사람들이 발 디딜 틈 없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모나리자나 비너스 앞에서 기어이 사진 찍고 가려는 한국인들 때문이다.

그래도 그게 어디인가.

미술관 밖에서 한 컷만 하고 재빨리 이동하는 것보다는 한 발짝 나간 셈 아닌가.

늦게나마 미술관 체험이 시작된 것이니까.

지금은 유치원에서부터 박물관 견학이 수도 없이 이뤄지고 있고,신문 문화면마다 돌아가면서 박물관 코너를 싣고 있다.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두꺼운 화집을 들추지 않아도 미술의 흐름을 어느 정도 훑을 수 있고,문화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며,나아가 직접 그 작품 앞에 서고 싶은 자극까지 받을 수 있다.

문제는 관심이다.

어디에서든 미술관이 보이면 들어가 길을 잃어보자.

그것이 그토록 아름다운 우리의 고려 불화나 ''직지심경''을 파리에서 서울로 되찾아오는 지름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