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천년의 첫 광복절을 나는 TV앞에서 보냈다.

50년의 세월을 독한 그리움의 상처와 함께 견뎌온 사람들.그 사람들의 눈물과 한탄,고통과 환희가 고스란히 펼쳐지는 풍경 앞에서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나 자신이 살아있다는 뿌듯한 느낌을 지울수 없었다.

그랬다.

지난 50년의 세월,우리는 죽음과 다름없는 부끄러운 시간들 속에 우리들의 숨소리를 풀어놓아야만 했다.

단지 남과 북으로 갈라져 있다는 이유만으로,그 삶의 방식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형이 아우를 부인하고 이웃이 이웃을 감시하고 지어미와 지아비의 살가운 정이 찢겨져 나가야 하는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동포의 이마에 뿔을 솟구치게 하고 괴뢰의 옷을 입히고….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이 지상에서 가장 추악한 범죄가 되어야만 했다.

그 범죄자에게 가해지는 어떠한 고통과 고문과 멸시도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 시간들의 얼룩….

남과 북에서 모인 사람들은 그 얼룩들을 자신들의 가슴 안에서 다 지워내고 있었다.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며 서로의 등을 쓰다듬어 주며,축축히 젖은 눈물 자욱을 손등으로 쓸어주며 그들은 서로의 이마에 솟은 못난 뿔을,그 부끄러운 생채기를 다 지워내고 있었다.

''밤이면 밤마다 어머니에게 가는 꿈길을 걸었지요.바위길이 다 닳아 모래길이 되도록 그 길을 걸었지요''

시인인 북의 아들이 남의 어머니에게 바치는 눈물의 헌사를 들으며 우리는 비로소 형제의 슬픔 위에 드리운 괴뢰의 칙칙한 옷을 벗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어찌 살아 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있으랴.어찌 살아있음의 따뜻한 감회를 느끼지 않을 수 있으랴.

초등학교 시절 나는 비밀 하나를 가슴에 간직하고 있었다.

그 비밀은 내 살붙이 어른들의 밤 모임에 관한 것이었다.

어른들은 자신들의 새끼들이 다 잠든 뒤에 그 모임을 가졌다.

그 중 한 씨앗이 그 모임을 엿듣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

그들은 무덤을 하나 만들자고 했다.

그 무덤의 주인은 나의 큰아버지였다.

어른들의 말에 의하면 큰아버지는 6·25때 월북을 했고 남쪽의 호적에는 행불자 처리가 되어 있다고 했다.

그런데 경찰에서 큰아버지 문제로 친척들을 계속 감시하고 있으니 아예 가묘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어른들은 가묘에 넣을 인골을 어떻게 구할 것인가 하는 이야기까지 했다.

어린 나는 이 모임의 불온성에 대해 잠시 생각했던 것 같다.

학교의 가르침에 의하면 어른들의 이런 모임은 고발의 대상이 될 수도 있었다.

어른들이 월북한 큰아버지의 가짜 무덤을 만들고 있어요.

아아,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어른이 되어서야 나는 내 살붙이 어른들의 그날 밤의 긴박한 모임과 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만남은 시작되었다.

남북한 1백명씩의 이산가족 상봉은 나라 안 1천만 이산가족의 첫 상봉의 불씨일 뿐이다.

서로 헤어져 산 사람들의 50년 세월은,그 긴 기다림의 고통은 더 이상 대물림되어서는 안된다.

냉전 이데올로기에 의한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가라는 치욕적인 명칭을 우리가 붙들고 갈 이유가 어디에도 없다.

생각하면 반도 안의 7천만 형제들은 모두 이산가족이나 다름없다.

가고 싶은 땅을 가지 못하고,보고 싶은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그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치욕과 다름없다.

나라안 7천만 살붙이 형제들은 서로 만나야 한다.

함께 모은 두 손에 꽃 한송이씩을 들고 서로의 이름과 고향과 추억의 노래를 불러주며 고통의 언덕을 넘어서야 한다.

50년 세월이 빚어낸 불협화음들,이데올로기 교육이 빚어낸 감정의 괴리들,익숙지 못한 언어의 장벽들을 행여 흠잡지 말자.

잘나서 못나서가 아니라 단지 한가지 이유,서로 행복을 공유하며 살아가야 할 살붙이 형제로서 우리는 우리의 만남을 그리워하며 꿈꾸는 것이다.

그리움과 고통에 전 첫 만남의 순간이여,통일의 그날까지 찬란한 빛 뿌리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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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약력=

△전남대 국문과 졸업
△시집 ''사평역에서''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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