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성호는 뮤지컬에 흠뻑 빠져 가사내용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우리는 민족 중흥의 선구자/우리는 자주국방의 간성/우리는 민족을 이끌어가는/자랑스런 민족의 아들들/위로는 위대한 지도자를 모시고/아래로는 밤낮없이 일하는 산업의 역군들/어느 누가 우리 앞을 막을쏘냐/어느 누가 우리를 당할쏘냐''

합창을 끝낸 출연자들이 무대 중앙의 원통 위에 서 있는 박정희에게 질문을 던진다.

''각하! 역사에게 한마디 해주십시오''

무대가 캄캄해지고 박정희에게 조명이 비쳐지며,박정희의 독백이 시작된다.

''역사여! 그대가 아무리 변덕스럽고 잔인하다 하더라도/이 사실만은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나는 조국의 헐벗은 산을 푸르게 만들었고,조국의 농촌에서 초가지붕을 몰아냈으며/조국의 농민들에게서 보릿고개라는 단어를 영원히 지워버렸다는 사실을//그것뿐만이 아니다.

언젠가 때가 되면,그때가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나의 아집이,나의 집념이,나의 잔인함이 풍요로움의 원천이 되었다고 이해하는 사람이 나올 것이다/조국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한 세대만에 산업화한 나라가 될 것이다//역사(歷史)여! 냉혹하고 잔인한 역사여! 이 말을 내가 그대에게 남길 마지막 부탁으로 받아다오/사랑하는 아내의 가슴에 흉탄을 박아 피를 쏟게 하고난 후/외로운 생애를 살다가 어린 아들을 남겨놓고 나 자신/또다시 흉탄으로 인생을 끝마쳐야 하는 불쌍한 노인의 기구한 운명을/제발 부탁이니,너무 가혹하게 다루지는 말아다오''

무대 위 출연자들이 연단으로 옮겨 도열하고,김명희는 퇴장하였다가 다음 무리를 이끌고 나온다.

대학생 복장을 한 청년들과 상복을 입은 여인들이 낮고 느릿한 음률로 합창을 한다.

''태어나지도 말았어야 할 그대가/어쩌다 세상에 얼굴을 내밀어/국민에게는 치욕을 주고/부모에게는 피눈물을 뿌리게 했나?/사람은 사람답게 자유를 누리며 살아야 하거늘/돼지우리만도 못한 세상에 배불리 살아서 무엇하리''

출연자들이 빠른 음률에 맞춰 가벼운 율동과 함께 노래를 시작한다.

''수출,수출 떠들어대며/툭하면 잡아넣고 툭하면 후려치고/경제부흥이다,민족중흥이다/경제발전이 무슨 소용 있나?/민족중흥이 무슨 개소리냐?''

그때 진성호는 바지주머니 안에 있는 핸드폰이 계속 진동하고 있음을 느꼈다.

무슨 급한 일이 있기에 이 시간에 자기를 찾고 있는 지는 모르나 은근히 화가 났다.

그는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환상의 세계에 다른 관객들과 마찬가지로 흠뻑 빠져 있었고 정말로 오랜만에 느끼는 그런 기분을 깨고 싶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핸드폰의 진동음이 주기적으로 계속 울리고 있었으므로 무슨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는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로비로 나왔다.

핸드폰 진동이 또다시 울렸을 때 그는 핸드폰을 귀로 가져갔다.

"회장님,저 이현세입니다"

여보세요,라는 말에 이현세 이사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에요?" 진성호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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