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성호가 세브란스병원 중환자실에 도착한 것은 저녁 9시경이었다.

남편인 자신도 면회가 허용되지 않았으므로 진성호는 담당의사인 민의준 박사 사무실로 곧장 갔다.

그가 미국에서 전화로 부탁했기 때문인지 민 박사는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진성호는 민 박사와 인사를 나눈 후 아내의 병세에 관해 물어보았다.

아직까지도 검사중이라 장담을 할 수 없으나 2개월에서 5개월 내에 의식이 부분적으로 회복될 확률은 50퍼센트를 넘는다고 민 박사가 전문용어를 사용하여 알려주었다.

진성호는 아내가 최고의 의료혜택을 받기를 원하며, 아내의 의식 회복에 도움이 된다면 세계 어느 곳에 가서라도 치료를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검사 결과와 병세가 어떻게 진전되는지 좀 두고 보면서 결정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며 민 박사는 그의 제의에 반대하지 않았다.

진성호는 민 박사의 허락을 얻어 아내를 보러 간호사의 안내를 받아 중환자실로 내려갔다.

간호사를 따라 중환자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넓은 중환자실에 여러 침대가 놓여 있었다.

간호사가 창 쪽 침대에 시선을 주었다.

진성호는 그쪽으로 다가갔다.

눈을 감은 채 산소호흡기를 입에 꽂고 있는 환자는 아내가 틀림없었다.

이마에 가벼운 찰과상이 눈에 띄었으나 화장하지 않은 아내의 모습은 어느 때보다도 평안스러워 보였다.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회오리바람이 그칠줄 몰랐던 9년간의 결혼생활이었지만 그 긴 세월 동안 지금처럼 아내가 평안하게 누워 있는 모습을 본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가 기억하는 아내의 모습은 항상 무엇에 쫓기는 분위기였고, 별것 아닌 지식이나 미를 과시하려는데 급급한 모습이었고, 주위 사람들을 위압하려 드는 태도였었다.

그렇다면 나는 이 여자를 진정으로 사랑한 적이 있었나?

진성호는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질문을 했다.

그렇다고 자신 있게 답할 수 없었다.

그러면 속마음이야 어떠하든 사랑을 표시해본 적이 있었나?

똑같이 그렇다고 답할 자신이 없었다.

그 순간 진성호는 자신도 아내와 마찬가지로, 아니 아내보다 훨씬 더 심할 정도로 무엇에 쫓기고 있었으며 힘을 과시하려 들었고, 상대방을 위압하려 들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자신은 보이지 않는 수많은 적에 둘러싸여 조직을 살리려고,자신이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쳐야 하는 입장에 있지 않았는가!

반면 아내는 기껏 하찮은 한 여자의 적밖에 없지 않았는가.

진성호는 김명희를 염두에 두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때 뒤쪽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성호는 뒤돌아보았다.

장인인 이인환 교수가 들어서고 있었다.

진성호는 그에게로 다가가 목례를 했다.

장인이 손을 내밀자 진성호가 두 손으로 잡았다.

"죄송합니다"

진성호가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아닐세, 내가 오히려 자네한테 미안하이"

"민 박사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나도 들었네"

"외국에라도 가서 치료를 할 수 있으면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 얘기도 들었네. 고맙네"

"의식을 회복하리라고 확신합니다"

"나도 굳게 믿고 있네"

그들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