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수도 개성은 번창한 도시였다.

조선의 실학자 이수광은 "지봉유설"에 개성의 주민이 13만호라고 했다.

김육도 "송경지"에 10만호가 넘는다고 쓴 것을 보면 대략 50만이 넘는 주민이 숨쉬던 대도시였음을 알 수 있다.

전성기의 경주가 17만8천호였다는 기록과 비교하면 개성은 그에 버금가는 도시였다.

고려의 개성은 정치의 중심지였을뿐 아니라 일찍부터 국제무역까지 성행해 중심지이기도 했다.

최초로 거리에 "영통""광덕""흥선""통상"등의 간판이 나붙였다는 곳도 개성이다.

교역대상은 거란 여진 송 일본은 물론 멀리는 동남아 및 아라비아제국들이었다.

인삼 칠기공예품 도자기 종이 먹 붓등을 수출하고 비단 금은세공품 약재 향로등 수입했다.

얼마전 북한의 개성토박이 향토사학자 송경록씨가 썼다고 해서 화제가 됐던 "개성이야기"에는 1024년과 그이듬해 아라비아 상인이 각각 1백여명씩 개성에 왔고 11세기에만 1만여명의 외국상인들이 왔었다고 적고 있다.

또 개성에는 영빈관 오빈관 회동판 등 나라별로 상관들이 설치돼 있었다고 한다.

왕조가 바뀌면 왕도는 몰락하게 마련이지만 개성의 경우는 좀 다르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서울로 천도했어도 개성상인들과 고려유신들은 그대로 개성에 남아 상업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조선조 5백년 동안 개성이 상업도시로 남을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개성상인들은 근검절약과 협동전신이 강하고 신용을 최고의 상업윤리로 삼은 것과 일종의 상인수습제도인 차인 제도로 특징지어진다.

그러나 우리상업사에 특기할만한 개성상인의 업적은 역시 이탈리아의 복식부기보다 2백~3백년이 앞섰다는 회계장부 작성법인 ''사개송도부치법''을 고안해 쓴 것이 아닌가 싶다.

김갑종(대림대 경영정보과) 교수가 존재만 알려졌던 개성부기 작성법을 개성상인의 후예 마종안(91)옹의 도움으로 복원시켜 한국 전통상학회에서 발표했다.

연구가 더 심화돼 개성부기가 민족의 합리적 이론적 면모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실로 굳혀졌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