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역사의 강은 간간이 여울을 이뤄 울며 흘렀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던가.

우리는 그 말이 헛소린 줄 알고 살아왔다.

국토분단과 동족상잔의 전쟁을 치른 다음 세월은 그만큼 많이 흘렀고 인심은 그렇게 굳어만 갔다.

그러다가 2박3일간 남북 정상의 만남이 성사됐다.

어리둥절한 한민족은 물론 세계인의 시선을 TV화상에 집중시킨 역사적 사건이었다.

김대중 대통령 영접 석상에 나온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1인 통치에 익숙한 모습 그대로였다.

14일 자정 가까이 서명된 공동선언문은 향후 남북교류의 물꼬를 트는 다섯 가지 원칙을 담고 있다.

통일문제는 남북이 자주적으로 풀어가고,남북의 통일방안에 공통점이 있음을 인정해 발전시키고,이산가족 상봉과 비전향 장기수 문제를 조속히 풀고,경제를 비롯한 다방면의 교류 협력을 활성화하고,합의사항 이행을 위한 당국회의개최에 합의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첫 만남의 흥분만으로 지난 50여년 쌓이고 쌓인 회한의 속앓이를 시원하게 풀어내기까지 아직 할 일이 많다.

경제협력을 비롯한 사회 문화 체육 보건 환경 등 다방면의 협력과 교류가 가장 기대되지만 몇가지 다짐해 두어야 할 게 있다.

경협에 있어서 정부차원에서는 상호주의에 따라 사사건건 등가성 원칙을 고집할 필요는 없겠지만,민간차원에서는 반드시 시장경제원리가 관철돼야 한다.

예측 불가능한 북한체제의 특성을 감안해 신분안전은 물론 상거래 분쟁조정,이중과세방지 등 국제관례에 따른 제도적 장치 마련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하겠다.

그리고 국교정상화에 따른 일본의 자본유입을 고려하더라도 북한의 외환보유고 사정에 비추어 향후 북한 "특수"를 과장하는 것은 금물이다.

노다지는 없다.

8.15에 즈음해 기대되는 가족방문이 수백만명의 실향민들에게는 일대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아쉬운 것은 비전향 장기수 문제를 거론하면서 북녘땅 어느 곳에 아직 생존해 있을 미송환 국군포로와 납치인사 문제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는 점이다.

추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다.

한반도 긴장해소와 통일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를 자주적으로 찾아가자는 기본방향에 이의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고립국가가 어디 있던가.

지구촌 시대에 한반도 긴장해소는 주변국을 비롯 국제적 파급효과가 크다.

바로 그 때문에 한반도 상황변화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주변 강대국의 이해관계를 견제하고 이용하는 넓은 시야의 안목이 요청된다.

대북한 경험에 강대국들의 참여와 지원을 유도하는 일이 중요하다.

북한의 사회간접자본 등 투자수요는 남한 혼자의 힘으로는 벅찬 일이다.

흔히 남북회담 이후 곧바로 군사비를 감축해서 사회복지 등에 자원투입을 들일 수 있는 "평화 배당금"에 들떠한다.

그러나 통일이 성사된 이후라도 한반도 군사력 감축에는 한계가 있다.

미국 다음 가는 군사강국의 중국,초현대식 무장을 증강하는 일본,여전히 대량 핵무기 보유국인 러시아에 둘러싸인 한국은 미국을 견제의 지렛대로 이용해야 한다.

자주국방정책에 있어서도 최신예 수준의 무기로 증강된 상당규모의 병력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독립국가의 필수 생존조건이다.

예상되는 김정일 서울방문이후 남북간 긴장완화에 진전이 예상된다.

아마도 남북회담이후 얻을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경제이익은 한국의 국가위험이 하향평가돼 국제금융시장에서의 가산금리 인하,직접투자촉진 등일 것이다.

우리는 하나라는 구호가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반도의 반쪽에서도 지역간 갈등이 있고 한 문중,한 가족내에서도 반목과 다툼이 있다.

이념을 달리해 전쟁을 치르고 이질체제하에서 반세기를 보면 남북한 사이에야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앞으로 다시 반세기가 걸리더라도 통일 대업의 벽돌을 하나씩 쌓아 올리는 일관된 인내심이 필요하다.

무엇이 북한을 협상의 자리로 나오게 했을까.

그것은 손해보다 이득이 많다는 치밀한 계산때문일 게다.

탄탄한 안보의 울타리 안에서 축적한 남한의 경제력이 외환위기에도 불구하고 휴전선 철책으로도 가릴 수 없을 만큼 돋보였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진정한 통일 일꾼은 그간 돌출 행동으로 으시대던 몇명의 소영웅들이 아니라 각자 일터에서 일상적 경제활동에 매진해온 절대다수의 평범한 국민들임을 알 수 있다.

깊은 강은 조용히 흐른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일할 때다.

그래야 통일의 날이 앞당겨 진다.

pjkim@ccs.sogang.ac.kr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